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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인 2020년 1월에 여기를 갔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18홀에 100불이 넘어가는 외국 골프장은 피하자는 원칙을 나름 세워놓고 있었다. 한국에서야 주말에 삼십몇만원도 흔하게 쓰지만 (싸고 괜찮은 골프장이 지천인) 미국에서까지 굳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Trump 내셔널은 (이름부터가) 당시에도 비쌌지만 underpar.com 바우처로 150불 정도에 쳤던 기억이 나고, 그것도 비싸다고 느꼈지만 골프코스만큼은 더 많은 돈을 치렀더라도 만족했을 것 같다. 트럼프 내셔널이라는 이름의 골프장이 플로리다에도 있는데 거기는 원래부터 유명했던 Doral 리조트를 인수한 거라서 보통 트럼프 내셔널 도랄이라고 부르며, 이쪽의 정식 명칭은 Trump National Golf Club Los Angeles. Rancho Palos Verdes라는 동네는 태평양을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잡은 고급 주택가인데 비싼 동네에 트럼프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100불을 넘겨 지불하더라도 거의 거저 수준이다. 아무튼 코로나를 거치면서 내가 골프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는데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고, 집합금지 등의 말도 안되는 상황을 겪으니 무조건 칠 수 있을 때 치자, 돈이 문제가 아니더라 그런 식으로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그런데 여기도 처음에는 Ocean Trails라는 명칭으로 개장했던 곳을 트럼프가 인수한 거라고 하며, 원래도 Pete Dye 설계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들여서 만든 (2억 5천만불 이상이 들었다고) 18홀로 알려져있다. Ocean Trails 골프클럽이 팔린 이유가 바로 18번 홀의 그린 때문이라는데 바다를 향한 언덕에다가 그린을 만들었더니 계속 지반이 무너져서 이를 보수하는데 수백만불이 들어서 결국 파산했고, 트럼프가 사들인 후에는 Jim Fazio를 시켜서 코스를 전반적으로 고쳤다. 문제의 18번 홀의 지반을 강화하는데에만 6천만불이 들었으며, 전장을 6,400야드에서 7,320야드로 확장하는 대신에 좁았던 페어웨이를 넓히고 그린을 약간 부드럽게 바꿨다고 한다. 2015년부터 PGA 투어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트럼프 소유라서) 결국 대회를 개최하지는 못했다. 여기도 꾸준히 가격을 올려서 주말의 오전 정가가 이제 인당 500불을 넘어가는데 그나마 12시 이후에는 백몇십불의 프로모션 티타임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운이 좋았지만 오전부터의 티타임이 거의 풀부킹 수준이던데 제대로 수백불씩을 내고 골프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난번에 왔던 (그때도 1월) 당시에는 차를 몰다가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내서 간신히 오후 1시 이후에 시작할 수 있었는데 해가 짧은 시기라 18번 홀은 거의 어둠 속에서 쳤었다. 밀리는 코스는 아니니까 이번에는 12시 반 티타임으로 잡았고, 오전에 Links at Terranea에서 9홀을 돌고서 왔으니까 드라이빙 레인지나 연습그린은 쳐다만 보면서 바로 1번으로 갔다. 오전에 비가 왔으나 금방 그쳤고, 바닷바람이 잔잔하게 불면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는 그런 오후였다. 오션뷰를 가장 우선으로 고려했을 입지에 피트 다이의 디자인이니 코스만 놓고 보더라도 쉬울 리는 없다. 바다를 향한 언덕에 비스듬하게 만들어진 페어웨이가 우선 티샷을 어렵게 만들고, 그린은 커다랗고 울퉁불퉁하다. 시작하는 1번 홀에서부터 가로로 길쭉한 그린의 앞에는 절벽이, 뒤에는 폭포가 있어서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무시무시한 어프로치를 하게 된다. 다만 그린의 우측으로는 안전하게 쓰리온을 노려보게 되어있어서 (보기를 감수한다면) 그저 어렵기만한 코스는 아니구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산을 향해 올라가는 1번 홀에서만 바다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의 거의 모든 홀에서 바다를 바라보게 되는데 이런 식의 오션사이드 코스가 처음인 동반자들도 연신 사진을 찍어대느라 좀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팀간 간격이 넉넉하기 때문에 거의 코스를 전세낸 기분이었다.
바다를 향해 티샷을 하는 11번은 짧은 파 3 홀이긴 하지만 무시무시한 벙커 뒷편에 핀이 꼽혀있었고, 힘주어 날린 샷이 벙커를 넘어 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오전에 고생했던 기억을 날릴만큼 짜릿했다. 540야드에 달하는 12번 홀에서도 티샷이 내리막을 타고 굴러서 200야드가 남은 지점까지 흘러갔고, 거기서 친 하이브리드샷이 그린으로 올라간 것도 잊지 못할 기억이다. 커다랗고 굴곡이 심한데다가 엄청나게 빠른 그린에서 간신히 쓰리펏으로 마무리했지만 이글펏을 노렸던 순간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홀들을 꼽자면 그린 뒷편으로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9번과 18번인데 특히 골프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갔다는 18번은 홀의 전장을 따라 벙커가 무시무시했으나 그린에 서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번 골프여행의 대미로 손색이 없었다. 우리는 물론 화이트티에서 쳤지만 18번에서만큼은 블랙티로 올라갔다. 마치 봉화대처럼 높게 솟은 언덕에서 날리는 티샷은 당연히 페어웨이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잊을 수 없을 경험이었고, 페어웨이에 공을 드롭하고서 저멀리 바다로 잠겨드는 태양을 바라보는데 내가 아직은 건강하게 골프라는 운동을 즐길 수 있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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