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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ld Ross라는 사람은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골프 붐이 일어날 당시 가장 잘나갔던 골프장 설계자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로골퍼인 그는 Old Tom Morris 밑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첫 직장이 매사추세츠 Watertown의 한 골프장이었다고 하며, 이후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Pinehurst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에 400여개가 넘는 골프장을 만들었고,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코스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의 설계자들이 골프장을 점점 더 길게, 어렵게 만들고 있는 탓에 도날드 로스 이후의 골프장을 모던 코스, 이전의 코스를 클래식 코스로 분류하기도 한다). 요컨데, 코스를 "설계"한다는 개념의 선구자격인 인물이었다.

도날드 로스가 디자인한 골프장 리스트 *

그런데 저 리스트를 보면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하고, 평생을 보낸 곳이 매사추세츠이기 때문에 그쪽에 그가 만든 골프장이 상당히 많다. 때문에 다른 지방에서는 "우리 골프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날드 로스가 설계한 명문 코스로서..." 어쩌고 자랑할런지 몰라도 이쪽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여기저기에서 흔히 보인다. 내가 살았던 브룩라인 근처에만 해도 (수많은 회원제 컨트리클럽들 말고도) Newton Commonwealth, Leo J Martin, George Wright, 그리고 지금 소개할 Ponkapoag 등등의 퍼블릭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관리상태가 거의 수십년간 방치해놓은 수준이라 남에게 권하기는 좀 그래도 트와일라잇 요금이 $20 이하라서 자주 갔었다. 지금에야 우리나라에서 주말에 30만원 그린피도 종종 내지만 어쩌다 한번인 주말골퍼니까 감수하는 것이고, 매일같이 골프장으로 출근하다보면 만원이라도 싸면 감지덕지하던 시절이었다. Ponkapoag은 설계자도 유명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깃든 코스라서 종종 언론에 등장하곤 한다. 2014년 US 오픈은 Pinehurst 골프장에서 열렸는데 예전 골프다이제스트의 기사를 보면 USGA에서 원래는 Ponkapoag을 2013년 혹은 2014년 US 오픈 개최장소로 주목하고 가능성을 조사했었다고 한다. 2024년 올림픽 유치전에 보스턴이 뛰어들었던 당시의 계획서에도 골프 경기장으로 여기를 거론했었다는 기사도 나왔었다. 나름 부지도 넓은 곳이라 혹여라도 그런 의도가 실현되었더라면 그런 아쉬움도 많이 남는 곳이다. 실은 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Ponkapoag 골프장은 2010년 여름에 내가 보스턴으로 와서 처음 가본 골프장이다. 당시 이세*, 심병* 선생님들과 '골프 한번 칩시다' 합의한 후 그나마 이세* 선생님이 가본 적이 있다고 하여 이 곳을 골랐던 것이다. 그때는 셋 다 백돌이가 부러운 초보였기 때문에 코스가 쉬운지 어려운지, 아름다운지, 그린이나 페어웨이 상태가 어떤지 따질 겨를도 없이 미국의 퍼블릭 골프장과의 첫 경험에 들떠있었던 시절이었다. 걷는 골프는 상상도 못했던 세사람이어서 털털거리는 (80 넘은 할아버지들 말고는 타는 이가 없는) 카트를 빌려타고 18홀을 돌았다. 당시의 코스가 아마 #2 코스였을 것이다.

이후에는 싼 맛에 종종 가는 골프장이 되었다. 36홀 코스인데 #2 코스가 제대로 18홀로 운영되고 (여기는 전반 9홀이 Donald Ross 디자인이고, 후반은 William Mitchell이 설계해서 1954년에 추가하였다), #1 코스는 당시에는 9홀만 열어놓았었다. 피크타임인 오전 9시경에 주차장에 차를 대면 벌써 1번 홀 앞에 골프백을 맨 채로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곳과 Leo J Martin 골프장은 매사추세츠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코스라 근방에서는 가장 그린피가 저렴한 곳에 속한다. 심지어는 여름의 트와일라잇 요금은 $12 밖에 받지 않아서 이 돈을 내고 18홀을 돌고 나면 뭔가 뿌듯한 기분도 든다. 물론 페어웨이는 "과연 이 곳에도 관리라는 개념이 존재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방치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기후 탓인지 맨땅은 아니고 잔디를 밟는 느낌은 난다. 그린은 듬성듬성 잡초도 보이는데다가 매우 느리다. 도날드 로스 코스의 특징은 나같은 문외한도 쉽게 깨달을 정도로 단순한데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살린 레이아웃이다. 그의 골프코스 디자인 철학도 역시 매우 단순하여 "상급자에게는 어렵게, 초급자에게는 쉽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령 티박스에서 250-280 야드 떨어진 페어웨이를 좁게 만들고 벙커를 배치하며, 180-200 야드 지점의 페어웨이는 넓고 평탄하게 만드는 식의 이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그다). 또한 홀마다 제각각의 특징을 부여하여 매번 공략법을 고민해야하는 즐거움도 있다. 그의 코스 중에서 최고로 유명한 파인허스트 No. 2는 아직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아마 (경관과 관리상태만 좀 낫고) 비슷하지 않겠나 싶다.

오랜만에 보스턴을 재방문하면서 내가 세운 계획은 이전에 가보지 못한 코스를 방문한다거나 좋았던 골프장에 다시 가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소개하기도 뭣한 코스들이라도 내 땀과 공을 갖다바쳤던 퍼블릭들을 다시 방문하여 추억에 잠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헉헉거리며 공을 굴리고 잃어버리곤 했던 거기에서 골프장들아~ 이제 나도 그럭저럭 친다라고 소리치고픈 얄팍한 생각도 있었다. 거기에, #1 코스가 최근에 다시 18홀로 공사를 완료했다고 하니 거기도 돌아볼 생각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는 느긋하게 나갔는데 #2 코스에서는 두 (카트를 타는) 할아버지와 조인하게 되었고, 2번 홀부터는 그들과 헤어져서 혼자 쳤다. 여러 해가 지났어도 코스의 구석구석이 기억에 생생해서 어디로 쳐야하는지 대충 알겠다. 홀을 거듭할수록 서서히 타이트해지고 어려워지는 식을 나는 정말 좋아하는데 여기는 원래 9홀 코스로 디자인되어 그랬는지 가장 어려운 홀이 2번이다. 좌측으로 크게 돌아가는 파 4 도그렉인데 저 아래의 그린이 보이려면 티박스에서 260야드는 가야한다. 거기서도 그린까지 180야드는 쳐야하는데 그린 앞의 내리막 해저드가 투온도 레이업도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놀랍게도 여기서 투온에 파를 잡았다). 이어지는 3번도 200야드에 까마득한 오르막 파 3 홀이고, 반면에 역시 좌측 도그렉 파 5인 4번은 투온이 가능하다. 그래도 전반은 여간해서 공이 사라지지 않는 파크랜드 코스이고, 진정한 즐거움은 후반이다. 도그렉에 언덕을 넘어가는 식의 Donald Ross 스타일이 그대로 나온다. 앞의 팀이 하도 느려서 그저 천천히 따라가다가 마침내 11번 홀의 티박스에서 패스하게 되었는데 가만 보니까 스스로 걷기도 힘들어보이는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 (갸륵한) 아들의 투썸이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야 골프를 치지 않으셨지만 나중에 내가 늙으면 아들이 저렇게 해줄라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홀들은 결국 16번부터의 세 홀인데 짧으면서도 어려운 이 디자인을 따라하는 이가 없는지 다른 어떤 골프장에서도 겪어볼 수 없는 재미였다. 몇년전보다는 그린관리를 좀 하나보다 싶었으나 페어웨이라고는 없는, 그러니까 티박스에서부터 그린까지는 전부가 러프인 열악함은 여전했다. 이번에 재방문한 다른 골프장들이 일취월장이라고 할만큼 관리상태가 좋아졌기에 여기도 좀 달라지길 기대한다. 관리상태와 별개로, 내게는 추억이 깃든 골프장이라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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