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번 보스턴 방문의 컨셉을 추억으로 잡고보니 내가 적어도 열번 이상 가본 동네 퍼블릭 골프장이 거의 열개는 되더라. 3일동안 다 돌아보려면 하루에 54홀은 쳐야하는데 카트를 타지 않을 작정이므로 쉽지는 않을 여정이다. 내년에는 보스턴 직항이 생긴다고 하던데 한국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까지는 어디선가 환승이 필요하다. 골프백과 옷가방을 챙겨서는 디트로이트를 경유하는 델타항공이 보스턴 로간공항에 내린 시각이 오후 2시경, 렌트카를 빌려서는 첫번째로 들른 곳이 바로 여기다. 늘 미국에 오면 느끼지만 워낙에 다들 짜증날 정도로 느려터져서 한국에서처럼 시간여유를 잡으면 안된다. 가방이 나오기까지 30분, 공항의 셔틀버스로 렌트카 사무실까지 가려면 또 30분은 걸린다. 거기에 로간공항을 빠져나오는 길이 (이쪽 동네에 살던 시절에도 그랬다) 워낙 복잡해서 시간을 잡아먹는다. 아무튼 코스에 도착하면서 평일의 늦은 오후라 한산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학교를 마친 고교생들이 이때쯤 몰린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저래가지고 골프로 대학을 가겠나 싶은 인근 고교팀 선수들을 앞에 두고 혼자 1번 홀부터 시작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워낙 구석구석이 익숙한 곳이라 두시간 정도로, 해가 지는 무렵에 18홀을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미국에서 골프를 쳐보면 퍼블릭 골프장이라도 수준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장 저렴한 부류가 소위 municipal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公立) 골프장인데 시립이나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곳들도 많고, 주정부 소유도 있다.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운영하는 퍼블릭 골프장은 Leo J. MartinPonkapoag 이렇게 두개이고, 보스턴 시가 주인인 골프장도 William J. Devine과 George Wright 두개다. 여기는 William J. Devine Memorial Golf Course at Franklin Park가 정식 명칭인데 미국 역사에서 두번째로 만들어진 (첫번째는 뉴욕 브롱크스의 Van Cortlandt 공원이라고 함) 퍼블릭 골프장으로 개장일은 1896년 10월 26일이라고 한다. 골프장 명칭이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기념하는 식인데, 미국의 골프 역사에서 George Wright라는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 한마디로 유서깊은 골프장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여기, William J Devine 골프장은 미국 역사에서 "최초의" 뭐뭐가 꽤나 많은 곳이다. 최초의 퍼블릭 골프, 최초의 여성 프로, 최초의 흑인 골퍼 등등.

George Wright 골프장은 조지 라이트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지만 설계자는 Donald Ross였고, William J. Devine 골프장을 만든 사람이 바로 조지 라이트다 (William J. Devine은 아마 당시의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레드스타킹스 (지금의 레드삭스)에서 유격수를 하던 George Wright는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간 유명한 야구선수였지만 미국 골프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많았던 분인데 그가 퍼블릭 골프장을 만든 사연은 이렇다고 한다. 은퇴후에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던 조지 라이트는 영국에서 크리켓 장비를 주문하려고 카탈로그를 보다가 골프공과 클럽을 발견하고는 (충동?) 구매하게 된다. 골프채와 공이 도착하자 어디선가 쳐보고는 싶었을텐데 골프장 회원이 아니었던 그는 인근의 Franklin 공원에 나가서 쳐보게 되는데 곧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게 되었다고. 골프는 골프장에서 쳐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당시의 컨트리클럽들이 모두 회원제이고, 서민들에게 개방된 곳이 없다는 현실을 알고는 시청에 출석하여 공무원들을 설득한 끝에 공원의 한쪽 구석에서 두번의 라운드를 허가받기에 이른다. 그 역사적인 날이 (미국에서 컨트리클럽이 아닌 공공장소에서 열린 첫번째 골프 라운드) 1890년 12월 10일이었고, 여론을 모으고, 여러차례 시의회에 출석한 끝에 그 자리에다가 퍼블릭 골프장을 만들도록 허가를 받는다.

The Country Club의 프로였던 Willie Campbell을 설득해서 9홀 코스를 설계하게 했고, 개장은 위에 적은 바와 같이 1896년 가을에 했다. 여담이지만 Willie Campbell이 4년뒤 사망하자 부인인 Georgina Campbell이 이 퍼블릭 골프장의 프로로 취임하는데 미국 역사에서는 그녀가 최초의 여성 프로골퍼로 기록되었다. 이 코스는 훗날 1922년에 Donald Ross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18홀로 확장하게 된다. 사실 나는 더 후진 골프장도 만족스럽게 다니곤 했으나 여기 Franklin Park 골프장은 영 아니었는데 골프장 자체보다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 탓이다. 역사적인 공원부지에 위치하긴 했으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름을 붙인 이 공원은 Frederick Law Olmstead가 설계해서 1885년에 개장함) Dorchester 라는 동네가 보스턴 남부에서도 흑인들이 몰려사는, 좀 살벌한 곳이다. 골프장에 막상 들어서면 거의가 백인들이고, 위험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핫도그라도 사먹을 생각으로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면 왕년에 껌 좀 씹었을 행색의 흑인 할아버지들이 바글바글해서 어리버리 들어온 동양인 남자를 신기해하며 뭐라뭐라 자꾸 말을 건다. 웅얼거리는 흑인 특유의 발음에 뭔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바짝 얼어서는 황급히 빠져나왔던 기억이다. 또다시 여담을 하나 하자면, 이 코스의 초기 단골손님으로 George Franklin Grant 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현재 널리 쓰이는 나무로 된 티를 (tee peg이라고 부른다) 발명한 사람이자 하바드 최초의 흑인 교수였다. 아무리 하바드 교수라고 해도 흑인은 컨트리클럽 회원이 될 수 없었던 시기에 살았던 덕택에 그는 미국의 골프 역사에서 최초의 흑인 골퍼로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백년도 전에 공원에다가 만든 골프장이니 길지도 않고 나무나 언덕도 별로 없이 그냥 훤히 다 보이는 그런 골프장인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도 못 쳤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내 실력이 그랬다. 그냥 저기 보이는 그린을 향해 전진하면 되는데 해저드도 OB 지역도 없지만 역시 Donald Ross 답게 후반으로 갈수록 단조롭지 않았고, 그린이 보이지 않는 홀들도 있어서 요즘 미국에 흔한 muni 코스와는 달랐다. 여러번 갔으니까 이번 공을 저리로 보내면 되겠구나 다 알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칠 능력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생각으로 다시 방문하기로 했는데 그사이에 Mark Mungeam이 리노베이션을 했다고 한다. 이 설계자는 보스턴 토박이인데다가 Geoffrey Cornish와 함께 (미국 북동부 지방에) 수많은 코스를 만들었던 대가인데 어려서부터 골프치며 지냈던 보스턴 시립골프장에 대한 향수와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역사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전형적인 퍼블릭 골프는 여기를 보면 이해가 된다. 못사는 동네의 공원 구석에 위치한 골프코스에 온갖 사람들이 평소에 입던 그대로 와서는 18홀을 걷다가 간다. 옷을 갈아입을 일도, 끝나고 근사한 식사를 하는 경우도 없다. 모르는 사람과 조인해서 통성명 정도를 하고는 골프가 끝나면 악수와 함께 쿨하게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1번 홀부터 돌면 그저 대단할 것도 없는 공원 골프장인데 비까지 내리니까 묵묵히 걷기만 했다. 티샷의 런빨이 없어서 그렇지 모처럼 잘 맞는 날인데 파는 몇개 못한 것이 파 4 홀들도 거의 400미터에 육박하기 때문에 투온이 쉽지 않았다. 중간에 300미터가 안되는 홀들도 간혹 나오지만 그런 홀들은 도그렉이거나 오르막이어서 또 어렵다. 진정한 Donald Ross 코스의 맛은 후반인데 어느 홀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전부 대단하다. 그의 특징인 그린이 보이지 않으면서 막상 그린이 시야에 들어오면 양쪽으로 벙커가 무시무시한 스타일의 연속이다. 벙커가 무섭다는 것은 말그대로인데 어차피 그린사이드 벙커지만 시각적으로 불편해서 제대로 캐리를 보내지 않으면 온그린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식이다. 벙커 사이에는 페어웨이가 그린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지만 그냥 한 클럽 더 잡고서 치는 편이 나았다. 옛날 코스여서 그렇겠지만 페어웨이가 교차하는 홀들이 몇몇 있어서 주말에 붐빌 때는 난감한 상황도 생길 것이다. 압권인 홀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18번이다. 티박스에서 저 아래로 공을 치지만 거기서부터는 다시 높은 언덕을 올라간다. 그린은 언덕 우측으로 있어서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튼 어떻게든 세컨샷으로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자신만만하게 여기까지 왔던 사람이라도 이게 도대체 뭐냐 싶게 어렵다. 오랜만에 가서 그런지 그사이에 리노베이션이 잘된 것인지 몰라도 George Wright 보다도 더 어렵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미국 골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Poquoy Brook, Lakeville, MA  (0) 2020.03.19
Segregansett, Taunton, MA  (0) 2020.03.19
George Wright, Hyde Park, MA  (0) 2020.03.18
Ponkapoag (#1), Canton, MA  (0) 2020.03.18
Ponkapoag (#2), Canton, MA  (0) 2020.03.1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