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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굉장히 가성비가 떨어지는 미국 방문이다 싶은데 일요일 비행기로 (그것도 대한항공 비즈니스석을 정가로 끊어서) 미국 LA까지 와서는 두어시간 회의를 하고, 밤에는 David Gilmour 콘서트를 봤으며, 호텔에서 하루 자고는 귀국하는 일정인 것이다. 그나마 LA에서 돌아오는 항공편이 밤늦게 있으니까 36홀 정도는 가능하겠다 싶어서 골프채를 짊어지고 온 것이다. LA 부근에는 마땅한 골프장도 잘 모르겠고, 비록 월요일 오전이지만 붐빌 걱정에 동쪽으로 한시간 정도를 달려서 소위 Inland Empire라고 불리는 Riverside 카운티의 골프장을 물색했다. 어차피 혼자니까 대충 가볼만한 코스를 정해서 무작정 가서 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오전에 Hidden Valley에서의 라운드가 끝나니까 아직 10시반이다. 아침을 먹지 않았으니까 근처 맥도날드에서 머핀을 입에 우겨넣으며 Golfnow 앱을 켰더니 주변에 수많은 골프장들이 나오는데 보통 주중 그린피가 $30 정도인 가운데 유독 70불이나 받는 곳이 하나 나온다. 홈페이지를 찾아서 들어가보니 Jack Nicklaus 설계인데 워낙 어렵다는 불만이 많아서 2011년부터 세번에 걸쳐 리노베이션을 했다는 스토리가 나온다. 페어웨이를 넓히고, 벙커를 없애는 등의 개조를 통해 하이핸디캡 골퍼도 공을 좀 덜 잃어버리게 했다 어쩌고 얘기를 읽으니 호기심이 생긴다.
골프장에 당도하니 아까의 Hidden Valley와는 비교가 안되는 어마어마한 클럽하우스가 눈에 들어온다. Champions Club은 이름 그대로 The Retreat라는 고급 주택가에 딸린 곳이고, 퍼블릭에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비쌀만 하겠구나 수긍하며 프로샵에서 돈을 지불하려니 37불을 내란다. 홈페이지에 나온 가격은 대체 뭘까? 아무튼 땡잡았으니 내 골프백에 공은 충분한지나 다시 살펴보면 된다. 멋져보이는 드라이빙 레인지도 딸려있어서 잔디파는 연습을 좀 할까 싶다가 어차피 종일 잔디만 밟는 날인데... 하며 블루티에서 첫 티샷을 시작한다. 어려우니 어쩌고 해도 화이트티에서는 5,700 야드 정도밖에 안되는 까닭이었는데 결국 LA에서 트럭운전을 한다는 모 한국인 청년과 조인한 3번 홀부터는 난생 처음으로 (그것도 이 어렵다는 코스에서) 맨 뒤의 챔피온티로 가기로 했다. 내 수준에 블루티도 무리인데 까마득히 페어웨이도 보이지 않는 빽티에서의 라운드는 사실 무리였다. 그러나 한때 프로골퍼를 지망했다는 모씨의 300 야드 티샷도 구경했고, 어차피 화이트티나 빽티나 홀당 공 하나씩 잃어버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잔디의 관리상태가 아주 좋았던 것에 더해서 경치도 아름다왔다. 계곡을 따라가는 식이라 극적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데 역시 무지 어렵다. 낭떠러지를 넘기는 티샷은 적어도 200 야드는 되어야 했고, 페어웨이는 여전히 좁았다. 게다가 그린으로 다가갈수록 여기가 원래 잭니클라우스 코스였구나 깨닫게 된다. 벙커나 해저드로 반쯤 막혀있는 포대 그린은 설사 공이 잘 올라가더라도 쓰리펏이 기본일 설계다. 대회라도 열리려는지 단단하고 무지 빠르기까지 했다. 그래도 스코어와는 별개로 느려터진 곳보다는 이런 그린이 재미있다.
리스크/리워드를 강조하는 디자인이지만 내 수준에서는 무조건 도전~ 을 외치면 무모한 상황이었다. 공을 많이 잃어버리면서도 수풀 사이에서 더 많이 줏은 날이기도 하다. 그래도 동반자인 모씨에게 몇가지 레슨을 받았다. 내가 백스윙에서 리버스피봇이 되고, 다운스윙에서도 머리와 몸이 따라나가기 때문에 공이 뜨지 않는단다. 어프로치도 지적받고 뒷팀이 없으면 한참을 연습했다. 덕택에 후반에는 내가 봐도 놀랄만한 샷이 몇번 나왔으나 여전히 골프장은 어려웠다. 쉽게 개조한 게 이정도라면 예전에는 대체 어땠을까 상상하며 후반으로 접어드니 나로서는 도저히 파가 불가능한 홀들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10번 홀은 파 4임에도 해저드 앞까지 180 야드 정도만 티샷을 보내야하는데 막상 거기까지 가서 보면 그린까지 또 180 야드를 보내야만 한다. 쓰리온도 어려운 것이 세컨샷이 그린에 미치지 못하면 저 윗쪽으로 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깊은 계곡밑의 러프에서 세번째 샷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치느라 고생, 레슨받느라 고생하니까 목이 타들어가고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지만 아름다운 코스에서의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다시 여기를 올 일은 없겠으니 (골프장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쪽 동네에는 워낙 괜찮은 곳들이 널려있어서) 공을 스무개는 잃어버렸어도 그리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요즘 살짝 수그러드는 골프에 대한 내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두번의 라운드를 마치고 나니까 엄청나게 피곤해져서 운전도 못할 지경이 되었지만 아직 해가 중천이라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하루 더 묵는다면 얼른 호텔로 복귀해서 늘어지게 잤으면 싶은데 이미 체크아웃을 해버렸고, 밤 11시반의 비행기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 이 골프장은 2020년 현재 폐장한 상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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