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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의 거의 1/3을 골프장에서 보내는 삶이지만 나는 원래 추워지면 채를 잡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데다가 가뜩이나 둔한 몸이 뻣뻣하게 굳으면 공도 잘 맞지 않고, 누런 잔디에서는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골프는 5/16에서 10/26이라는 말이 있어서 11월부터 4월까지는 해외로 나갈 궁리를 하곤 했었다. 가끔 날이 풀리면 번개로 국내 골프장에 나가기도 했지만 그저 답답함을 달래는 목적이었지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골프를 처음 시작한 십여년전에 영하의 날씨에 억지로 끌려나가서 악몽같던 너댓시간을 보냈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랬던 내가 올해는 (12월이 되었어도) 줄기차게 나간다. 서울 근교가 여전히 비싸고 추우니까 이제는 5시간 운전도 마다하지 않고 저아래까지 다녀오곤 한다. 골프만 놓고 보더라도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는 정말이지 엄청나다고밖에는 표현이 어렵고, 끝이 언제일지 그리고 설사 끝난다고 해도 다시 예전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갈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 4월에 한달간 휴가를 얻었었는데 본래의 계획은 혼자 미국에 가서 렌트카를 몰고 서부에서부터 애리조나, 유타, 네바다 등을 돌아다니려고 했었다. 트렁크에 골프채와 여행가방을 싣고는 어디 골프장이 보이면 들어가서 18홀을 치고, 해가 지면 길가의 모텔에서 잠을 청하는 식으로 몇주를 보내는 것이 내 오랜 버킷리스트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면서 일단 휴가를 12월로 미뤄야 했고, 이 휴가가 올해내에 쓰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인데다가 연말이면 미국은 아니라도 어디 동남아 정도는 다녀올 수 있겠지 했었는데 결국 출근만 하지 않을뿐 집에만 있게 되어버렸다. 결국 제주도에라도 가서 일주일 골프나 치다오는 것으로 타협을 했고 (제주도에라도가 아니라 실은 12월에도 여기는 티타임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그래서 잡은 첫번째 목적지가 여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나라에서의 골프는 동반자 두세명이 필요한데 나랑 놀아주겠다고 찾아와준 몇몇 지인들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겨울의 제주도에서는 바람이 적은 동쪽이나 서귀포 인근이 선호되지만 올해 제주도의 부킹난이 엄청나서 골프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에버리스 골프리조트도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비바람 속에서 동반자가 오르막 파 5 홀에서 투온에 이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고, (다른) 동반자의 비매너에 화가 나서 (내 골프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간에 백을 내렸던 기억도 있는 곳이다. 27홀에 신안그룹이 주인인 골프장답게 설계자는 밝혀져있지 않지만 서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아름답고 재미있게 조성된 곳이었다. 이번에는 오전 8시경의 티타임이라 금요일 저녁의 비행기로 내려가서 하룻밤을 잤는데 대개 1,2부제로 운영하는 우리나라 골프장은 오전 9시 정도부터 11시까지는 티타임이 없기 때문이다. 팀을 더 받겠다는 운영의 목적이겠지만 적어도 제주도의 골프장들만은 원웨이 진행에 비는 시간없이 오전내내 티타임을 받으면 좋겠다.
레이크/새별/파인 코스로 이름붙은 27홀 코스들 중에서 이날 우리가 도는 18홀은 새별과 파인 코스. 골프장에서 바라보이는 오름의 이름이 새별이어서 새별코스는 이해되는데 다른 두 코스에다가 좀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제주도의 서쪽으로 골프장들이 많지만 늘 느끼는 것이 비와 바람에 취약한 동네라는 것인데 이번에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골프를 쳤지만 다행히 기온이 영상 10도까지는 올라가주었다. 첫번째 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주 끝내주는데 결국 저 아래에서 다시 올라와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그리고 공이 사라지기 적절하게 만들어놓은 해저드와 숲 때문에 샷이 편안하지 않았다. 21세기 들어서 개장한 골프장에 어울리지 않게 투 그린 시스템인데 그래도 모처럼 초록의 잔디를 보니까 좋았다. 이국적이기보다는 익숙한 느낌의 페어웨이는 전반적으로 넓고 편안했지만 적절하게 벙커와 해저드도 있었다. 레이크 코스가 제일 길고 어렵다고 하는데 어차피 화이트티에서는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최고의 뷰는 클럽하우스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였고, 새별 9번에서 바라보는 오름도 멋있었다. 심심하지 않게 도그렉과 비스듬한 언덕도 있어서 여기가 외국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공도 오랜만에 잘 맞았다. 몇달전 레슨을 받기 시작해서 코로나로 연습장이 문을 닫기도 했고, 프로들이 그만두는 바람에 세번째로 배우는 프로님인데 그동안 나는 뭐한거지? 싶게 좋아졌다. 세번째 프로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전혀 공을 맞추지 못하는 멘붕을 잠시 겪었으나 결국은 공도 멀리 똑바로 가고, 폼도 좋아졌다. 골프라는 운동이 워낙 기복이 심한 줄을 알기 때문에 못칠 때에도 이러다 좋아지겠지 했었고, 지금도 이러다가 또 망가지는 시기가 오려니 한다. 희안하게도 샷이 좋아졌음에도 스코어는 제자리다. 당연히 끊어가던 홀에서 투온을 노리는 등의 변화가 있었고, 무조건 나는 숏게임이야 하던 자신감이 좀 옅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마추어는 스코어보다 가끔 나오는 굿샷에 행복해지는 법이다. 내가 친 것이 맞나 싶은 샷이 나오면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행복해져서 치핑이 미스나거나 쓰리펏을 해도 허허 웃어버리게 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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