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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 레이크사이드 서코스와 바로 붙어있는 36홀 골프장인 88 컨트리클럽은 국가보훈처가 주인이라서 다소 꼰대냄새가 나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던 곳이다. 입지가 좋기 때문에 종종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언제나 어려운 분들을 모시고 갔었기 때문에 중간에 핸드폰 꺼내서 사진찍고 그럴 겨를이 없었다. 예전같으면 추운 겨울에 그리 싸지도 않은 88cc를 갔을 리가 없었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비가오나 눈이오나 우리나라 골프의 열기가 식지 않는 시기라 누가 여기를 회원가로 부킹했다고 하니 오케이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에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념해서 이름이 88 cc라고 함) 김명길 씨와 미야자와 조헤이 (宮澤長平)의 설계로 개장한 이 골프장은 나라/사랑 코스와 호국/보훈 코스로 불리던 36홀이고, 개장하던 당시에는 서코스, 동코스라고 했으나 2015년엔가 코스의 이름을 (저렇게 유치하게) 바꿨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는데 이날 우리가 부킹한 나라/사랑 코스가 지금의 서코스다. 아무튼 추워진 날씨에, 작년같으면 12월 중순에 골프치자고 누가 말하면 미친 거 아냐? 했을 시기에 드디어 2020년 납회를 한다. 전신을 두꺼운 옷가지로 감싸고, 핫팩을 흔들어가며 시작하자니 코스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밋밋하고 똑바른 홀들에 작고 동그란 투그린이라 뻔한 스타일이구나 했다. 그러다가 서코스 4번에 다다르면 만만찮은 우측 도그렉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티샷을 오비내고 특설티에서 친 어프로치가 그대로 홀로 들어가버려서 어이없게 (오비이글이라고도 하는) 파를 해버렸던 그 홀이었다. 그리 잘치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이런 황당함이 골프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홀들은 다시 넓고 똑바른 모양으로 돌아간다. 골프장이 놓인 지형이 산기슭이기 때문에 경치만큼은 밋밋하지 않았는데 이날 초대해주신 분의 설명으로는 동코스가 좀 더 산악지형이라고 한다. 누런 잔디에 눈쌓인 골프장 풍경을 사진으로 담자니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여기는 종종 오는 곳이므로 조만간 저 사진들을 업데이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바위같은 티박스에 애써 티를 꼽고는 티샷, 눈속에서 내 공을 찾아내어 다시 철판마냥 단단해진 그린으로 어프로치한다. 골프가 재미있으려면 스윙이나 퍼팅도 좋아야하지만 코스의 상태도 중요한데 영하의 날씨에서는 아무리 관리하더라도 즐거운 라운드는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그저 좀이 쑤시니까, 채를 휘두르고싶으니까 나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스코어도 의미없는 것이, 한겨울 골프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잘 쳤다고 잘 가고 그러지 않는다. 아마도 오늘이 2020년의 마지막 라운드가 될 것인데 돌이켜보면 올해는 내 인생에서도, 인류역사에서도 잊혀지지 않을 일년이었다. 아프지 않으면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기뻐해야할 날이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렇다는 것인데 기념비적인 한해를 마무리한 88cc는 오랜 역사에 비해 많이 낡지도 그렇다고 럭셔리하지도 않은 골프장이었다. 나는 88 cc에 대해 남다른 기억이 하나 있는데, 신혼집을 인근의 용인시 구성면에 마련하고는 서울로 출퇴근하던 30대 초반에 종종 이 골프장의 진입로를 지나치곤 했었다. 검정색 고급 승용차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곳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나는 나중에라도 한번 와볼 수가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골프를 치지 않았던 시절인데 하루는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다가 무작정 차를 틀어 구불구불한 진입로를 올라가서, 저만치에서 클럽하우스와 코스를 바라보며 압도당했던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당시의 나는 골프나 유흥은 고사하고 주말에 놀러다니는 것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면 왜그렇게 찐다같이 일만 하고 살았을까 싶고, 한편으로는 그때 내가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살았다면 지금은 내 모습은 좀 다를 거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