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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지명을 선점하였던 골프장들이 (고리타분한 인상에서 벗어나고싶었는지) 이상한 외국어 이름으로 개명하는 경우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안타까운데 우리나라 골프사를 논하자면 빠질 수 없는 제주 컨트리클럽도 올해부터 The Siena cc로 바뀌었다.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싶었는지 그간의 부정적인 평가를 쇄신하려는 의도였던지 아무튼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을 선뜻 던져버리는 모양새가 아쉽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제주 cc를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판단할 수가 없고, 주변에서 거기는 가면 안돼 그딴 소리는 작년까지 많이 들었으므로 이름도 바꿨는데 나빠졌겠냐 더 좋아졌겠거니 하면서 간다. 주지하다시피 여기는 연덕춘 씨의 설계로 1966년에 개장했다가 수차례 망했다가 다시 열었다가를 반복한 18홀 골프장이다. 세간의 부정적인 평가는 부도처리후 수년간 주인없는 골프장으로 방치되었던 이유가 클 것이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잔디의 상태가 좋아보였고, 오래된 골프장답게 나무가 울창하고 넓어서 일단 제주도의 이국적인 느낌은 별로 없었다. 조용한 산중에 있고, 저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홀들도 있긴 하지만 잘 꾸며진 휴양지라기보다는 도심의 파크랜드 스타일이다. 이 골프장이 생긴 계기가 제주도를 관통하는 소위 516 도로의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치에 감탄하여 여기다가 골프장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시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골프장 한가운데를 그 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후반의 홀들에서는 지나가는 차들을 신경쓰며 친다. 설계자의 의도라기보다는 원래의 자연이 그렇게 생겨먹었을텐데 재미있는 홀들도 몇몇 기억에 남는다. 경치로는 아일랜드 홀이면서 그린이 정말로 동그란 섬이었던 서코스 7번과 저멀리 바다가 배경이며 파 3로 끝나는 동코스 18번이 근사했다. 숲이 오래되어 미국 골프장인가 싶었고, 오래된 코스지만 내 입장에서는 처음 와보는 것이라 숨겨진 진주를 찾은 것처럼 감탄했는데 무엇보다도 화창한 날씨가 좋은 평가에 일조했다.
동코스의 17번은 일명 김일성 홀이라고 불렀다는데 가파른 오르막에 욕나오게 어려워서 그렇게들 말했겠지만 요즘 세대라면 김일성이 누구인지도 모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오래된 골프장임). 두번만에 올라가지 못하면 등산을 해야한다고 이를 악물고 쳤더니 투온에 파를 했다. 잔디의 관리상태가 좋은 편이었는데 최근 비가 많이 온 이유도 있을 것이지만 신경써서 관리하는 티가 났다. 그린에서도 한라산 브레이크를 신경쓰기는 해야하는데 이날은 좀 느려서 휘는 경우는 덜했고, 본대로 잘 굴러간다. 다만 포대그린이 대부분이라 굴려서 올라가기는 힘들고, 높은 탄도의 어프로치가 필요한 디자인이었다. 커다란 원그린 시스템은 원래부터 이랬는지, 중간에 리노베이션을 했는지 궁금. 새로운 주인이 클럽하우스를 재건축하고, 인기 골프리조트로 탈바꿈하려고 애쓰는 모양이었으나 지금 수준으로도 제주도의 수많은 좋은 골프장들과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공항에서 멀지 않은 것도 나름 메리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연많은 골프장에 대해서 또하나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래전 기관장으로 제주도에서 지내셨던 분의 말씀으로는 제주 cc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우리나라 골프장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을 거라고 했는데 사실이라면 거의 문화재 취급을 받아야할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으나 당시 제주도에서 골프칠 사람이 몇명이나 되었을까 계속 적자를 내다가 몇년만에 폐업하고 방치되었고, 동네 유지들이나 공무원들이 부킹이고 뭐고 없이 그냥 와서는 골프치다가 돈을 낼 필요도 없이 돌아가고 했단다 (시내에서 가까운 대로변에 있으니 접근도 쉬웠을 것이다). 코스관리를 누가 하지도 않았을 잔디밭이지만 공짠데 어떠냐 그렇게 연습하다가 재임기간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떠나곤 했다는데 덕택에 처음 설계된 그대로 남아있는 코스가 되었다. 이제 새로운 주인이 이름도 세련되게(?) 바꾸었으나 원형을 가급적 보존하는 식으로 관리에만 신경써주시면 좋겠다. 설계도나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오직 산세의 흐름에 따라 페어웨이를 내고, 그린을 만들었을 투박한 코스는 그 자체만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