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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뭐랄까 전처럼 자나깨나 골프칠 생각만 하지는 않게 되었는데 이 변화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취미나 본업에 치여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치는 족족 원하는 자리로 공이 가주니까 재미가 없어졌어 그런 수준은 당연히 아니다. 12월 들어서도 국내에서 골프장에 한두번 나가기는 했는데 아무튼 멍하니 주말이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기간이 몇주는 지나버렸다. 인생이 평탄하게 느껴져서 그런가, 원래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여행계획도 짜고 안하던 방청소도 하고싶어지는 법이지만 막상 시험이 끝나면 다 귀찮아지는 그런 느낌? 연습장도 다시 나가보지만 이 블로그의 명칭처럼 골프에 "미쳐"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누가 자카르타에 간다고 해서 그러면 나도 따라가서 골프나 칠까? 충동적으로 가게 되었다. 남은 휴가일수가 몇일 있어서 그렇지 겨울이라고 몸이 근질거려서는 분명 아니었다. 목요일 오후의 비행기로 떠나서 금토일 3일간 공만 치다가 오는 일정인데 예전에 갔던 당시처럼 현지에 거주하는 신** 형이 짜주는 일정대로 움직인다. 인도네시아의 12월은 우기라서 비가 자주 오지만 다행히도 사흘내내 시원하고 맑은 날씨였다.
금요일에 가는 골프장은 자카르타 다운타운에서 아주 가까운 Pondok Indah 골프장이다. 정확히 3년전에도 방문했던 이 골프장은 Robert Trent Jones 주니어가 설계해서, 1983년에 골프 월드컵 (이런 이름의 대회가 실제로 있다!)을 개최하기도 했던 명문 코스다. 올해에는 아시안게임 골프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3년전 당시에는 우중 (雨中) 라운드였고, RTJ 코스에서 잘친 기억이 없었던 수준이었기에 어렵더라는 느낌만 있었다. 그래도 관리상태와 조경은 인도네시아에서 탑급이고, 주변에서 가장 대규모인 쇼핑몰이 붙어있음에도 코스 안에 들어가면 세상과 격리된 기분이 든다. 티타임보다 한시간쯤 먼저 도착하였기에 우선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공을 좀 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오듯이 흐르는 땀으로 이러다가 정작 라운드도 못해보고 죽는 것이 아닐까 싶게 더웠다. 한국에서는 한파예보를 뒤로 하고 왔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되어 요금을 치르고 1번 홀부터 시작했는데 의외로 샷이 잘 되어서 우쭐한 기분으로 전반을 마쳤고, 후반에는 배고픔인지 더위를 먹은 것인지 헐떡거리며 쳤다.
화이트티에서 쳤더니 티샷이 잘 맞으면 웨지 거리가 남아서 내 실력이 좋아졌냐 예전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궁금해졌다. 주변에 아파트같은 건물들이 보이긴 하지만 페어웨이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서 플레이에 부담스럽지 않다. 페어웨이는 여느 동남아 잔디와 달리 미국식의 블루그라스나 벤트그라스인 것 같다. 덕택에 러프는 반드시 피해야할 지역이 된다. RTJ 코스치고는 비교적 작고 평평한 그린은 역시나 많이 빨라서 건기에는 어떻게 치겠냐 싶을 정도. 볼마크가 군데군데 보이는데 친 사람이 직접 수리하는 미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나라이긴 한데 캐디들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듯 보여 좀 안타까왔다. 이 골프장의 홀들은 대회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인지 쭈욱 뻗어있는,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여서 잘 치고도 낭패를 겪는 일은 적었다. RTJ 코스는 어렵자면 상상을 초월하게 어려운데 코스에 대한 이해만 한다면 화이트티에서는 그럭저럭 칠만하다. 도심 속의 정원같은 스타일이라 호불호가 분명 있겠지만 자카르타 인근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코스중에 하나이며, 생각보다 작은 그린과 주변의 벙커들이 스코어를 방해하지만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는 코스다. 대개의 홀들이 직진이지만 다 다른 느낌이고, 그래서 도전적이고도 어렵다. 페어웨이는 너그럽게 티샷을 뱓아주지만 막상 공앞에 가서 보면 그린을 공략하기에 좋은 쪽이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어서 이런 식의 코스에서는 캐디가 경험이 많거나 몇번 와봤어야 한다. 남탓을 할 이유는 없겠지만 웃기만 잘하고 어째 멍청해보이는 캐디를 배정받은 내 입장에서는 파가 최선이다.
내가 경험한 RTJ 코스 중에서는 시카고 북쪽에 Thunderhawk가 가장 어려웠던 기억인데 거기는 매우 극단적인 타겟 골프여서 그랬고, 여기 Pondok Indah는 보기플레이로 만족한다면 즐거운 곳이다. 논멤버 비용이 18홀에 십만원 이상 드니까 싼 것은 아니지만 골프장의 위치나 수준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았다. 중간에 뭐를 먹기도 그래서 음료수만 마셔가며 18홀을 돌았는데 후반에는 샷이 많이 망가졌다. 덥고 지치니까 이게 배가 고픈 것인지 탈수인지 모르겠는 몸상태가 되어서 힘들었으니 담배를 끊던지 살을 빼던지 해야겠다. 끝나고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먹은 냉면과 볶음밥은 가격대비 비추. 주변이 자카르타에서도 핫한 쇼핑몰이니 굳이 식사를 여기서 할 이유는 없었으나 워낙 지쳐서 대충 먹기는 했다. 몇차례 방문을 통해 얻은 결론은 자카르타 시내를 벗어나기 힘든 경우라면 우선 추천할 골프장이지만 여유가 된다면 Bogor 지역에 널린 코스들을 섭렵하는 편이 가성비로는 더 낫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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