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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급적 새로운 골프장을 선호하기 때문에 가봤던 곳은 굳이 다시 가지는 않는다 주의인데 시카고 인근에서는 여기 Thunderhawk는 꼭 한번 다시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골프장은 아니다. 마치 아름다운 여자를 침대로까지 끌어들였는데 막상 제대로 못한 그런 기분이랄까 아쉽고 부끄럽고 그런 코스였기 때문이다. 쌩초보였던 2013년 당시의 나로서는 처음 접해보는 Robert Trent Jones 2세의 코스였고, 어렵다는 말은 들었어도 워낙 끔찍한 라운드를 경험한 탓이다. 일리노이주 퍼블릭으로는 손꼽히는 코스인데 실은 여기는 시카고 인근은 아니고, 한참 북쪽으로 밀워키 방향으로 올라가서 거의 주경계에 있는 골프장이라 한시간 반 이상을 운전해야 한다 (시카고에서의 거리나 밀워키에서의 거리나 거의 똑같다). 당시 시카고 맥코믹센터에서 오전에 회의를 마치고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차를 몰았는데 올라갈수록 어째 우범지대 깊숙히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골프장인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 Beach Park이지만 해변과도 공원과도 관계없을 그런 동네였다. 덕택에 이름난 골프장임에도 사람이 별로 없게 한산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첫 홀로 가니 스타터가 혼자 온 미국인이 한 명 있는데 같이 출발하라고 해서 암튼 거기까지는 좋았다. 풍광도 끝내주는데 관리상태도 완벽해보인다. 그런데 첫 홀의 티샷부터 공은 수풀 사이로 사라져버린다. 갈대밭을 헤매다 결국 새 공을 드랍하고 친 써드샷도 잘 맞았다 싶더니만 해저드로 가버리고 만다. 좁고 구불구불한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하면 그냥 끝이다. 멘붕에 그때부터는 제대로 맞는 샷이 없다. 한동안 안하던 쌩크에 슬라이스에 그냥 공과 함께 클럽도 호수에 던져버리고픈 생각이 들었다. 몇번째 홀이었던가 늪지대에서 신발이 푹푹 빠져가며 공을 찾노라니 내가 이거 머나먼 이국에서 쌩돈 날려가며 뭐하는 짓인가 싶어 한숨만 나온다. 에잇, 공은 포기하고 그린으로 가니 동반자인 미국인은 드라이버와 퍼터에 커버를 씌우며 말없이 악수를 청하고 떠나버렸다. 그게 아마 전반의 6번 홀인가 그랬다. 이후로는 나도 말없이 기계적으로 샷을 하고는 공을 찾을 생각도 없이 대충 저만치 걸어가서 또 공을 꺼내놓고 치고 그런 식으로 18홀을 돌았다. 거의 앵그리버드의 주인공처럼 화가 잔뜩 나서는 (가진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공을 쏘아댄 날이었다. 골프장의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아마 최고의 수준이지 싶은데 저렴하지 인적은 드물지 관리상태 완벽하지 거기다가 어렵기까지... 아마 당시보다는 실력이 나아졌을테니까 꼭 다시 만나서 쓰러뜨려보고픈 그런 골프장이었다.

작년 4월에도 시카고에 간 김에 꼭 여기를 방문하려고 했었는데 추운 날씨로 5월은 되어야 문을 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방문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6월초순이니까 날씨는 문제가 아니었고, 올라가는 김에 주변 골프장들까지 방문하면 딱이었다. 늦게 개장하는 만큼 잔디의 상태는 최고로 보였고, 다만 평일 오전에 칠십몇불의 그린피는 좀 비싸보였다. 돈이 문제인 코스는 아니었으므로 기꺼이 지불하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번 홀에 섰다. 어렵다고는 하지만 작년에 갔었던, 올해 PGA 챔피언십이 열린 Bethpage Black처럼 파가 아니면 양파라는 식은 아닐 것이고, 보기플레이가 목표라면 돌아갈 구석이 있는 것이 RTJ 코스의 특징이다. 이런 코스는 카트를 타지 않고 걸어야 제맛인데 하루에 18홀만 돌 것이 아니라면 발건강을 생각해서 카트를 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블루티 플레이를 잠깐 고민했었는데 어차피 쓰리온을 목표한다면 세컨샷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전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화이트티에서 혼자 출발한다.

골프장 설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하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본 덕택에 대충 근사한 코스가 어때야하는지 감이 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우왕좌왕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출발하는 1번 홀은 평범하면서도 앞으로의 몇시간이 기대되게 보여야한다. Thunderhawk의 1번은 똑바르고 비교적 짧은 파 5 홀인데 아마도 여기서 가장 쉽게 플레이되는 홀일 것이다. 몇일간 내렸던 폭우 탓에 페어웨이로 카트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도 양탄자같은 잔디를 밟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양쪽의 러프만 피한다면 투온에 무리가 없고, 넓직하고 평평한 그린도 이 골프장에서 가장 쉬운 그린일 것이다. 그리고 2번부터는 RTJ가 만들어놓은, 상벌이 확실한 홀들이 나타난다. 페어웨이가 양측으로 나뉘어진 파 5 홀인데 티샷을 230미터 정도 보낼 수 있다면 왼쪽으로 올려서 투온을 노려볼 수 있고, 단타자라면 위측 페어웨이를 경유해서 쓰리온 내지는 포온이 가능하다. 여기서부터 그린이 매우 어려워지는데 일단 그린까지 어렵게 가기 때문에 그린의 복잡함은 아직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후의 파 4 홀들은 아예 쓰리온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야 안전하게 보기라도 할 것이라고 본다.

내 생각에 가장 즐겁고 (한편 무시무시하고) 아름다운 홀이 18번인데 여기서는 티샷을 멀리 보낼 필요가 없고 그저 똑바로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세컨샷으로 해저드를 넘겨서 투온하는 것은 아마도 브룩스 켑카라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인데, 티샷보다도 세컨샷으로 적절한 위치로 레이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써드샷으로 온그린하기도 상당히 어렵지만 어프로치 위치에서의 경치가 힘든 라운드를 마친 골퍼를 위로한다. 이날의 내 스코어는? 일종의 복수전으로 삼은 라운드였는데 예전처럼 무지막지 어렵다기 보다는 상당히 공정하게 만든 코스라는 느낌을 받았다. 코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저 내가 못쳤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에도 RTJ 주니어가 관여한 골프장들이 이제는 좀 되는데 오래전 만든 휘닉스를 시작으로 웰리힐리, 레인보우힐스, 알펜시아, 용평, 오크밸리 등이 있으니 다들 어렵기로 소문난 코스들이다. 이들 국내 코스들과 마찬가지로 Thunderhawk도 (어렵긴 하지만) 아름답고 재미있는 골프장이어서 또 와보고싶은데 주변에 싸고 괜찮은 코스들이 즐비한 시카고 인근에서는 좀 비싼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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