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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경그룹이 곤지암에다가 만들어서 1987년에 개장한 중부 컨트리클럽은 비록 소위 말하는 "곤지암 3인방"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역사가 있는 명문 골프장이다. 안양 cc 등을 설계한 바 있는 일본인 미야자와 조헤이 (宮澤長平)와 장정원 씨가 만든 18홀 회원제 코스인데 골프장들이 어려웠던 몇년전에는 퍼블릭 부킹도 종종 가능했었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가볼 기회가 없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이날은 제주도에서 공을 치고있어야하는데 일행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생겨서 취소하고는 급히 부킹을 수배해서 가게 되었다. 몇일째 연속으로 골프치는 시절이라 차라리 잘되었다 싶기도 했고, 부킹이 어려운 중부 cc를 마침 회원과 연결된 것도 다행이었다.
몇년전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은 별로 없는데 Golfshot의 스코어카드를 보니 백돌이 골프를 쳤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렀으니 좀 나아졌으려나 두근두근 심정으로 길을 나서는데 역시 곤지암 인근의 골프장은 서울에서 가까와서 편안하다. 아침을 먹고 나서니 전날 내린 비로 어느덧 초록색이 절정인, 드넓은 페어웨이가 우리를 반긴다. 샷을 계획하고, 측정해서 쳐야하는 요즘의 어려운 코스와 딴판으로 예전에 만들어진 이런 곳은 원래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저기 어디쯤엔가 타수를 잃게 만드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 긴장할 필요가 덜하다. 30년의 역사가 보증하는, 좌우로 여유가 많은 페어웨이는 평탄했고, 그린은 빠르지만 정직하다. 이날 나는 한달전에 미국에 다녀온 이래 가장 잘 쳤다. 전장이 길기 때문에 스코어는 최고가 아니었지만 드라이버, 세컨샷, 어프로치, 퍼팅 모두 만족스럽게 쳤다. 특히 동코스 1번 홀에서 500 야드를 투온해서 버디를 잡는 순간은 정말 짜릿했다. 편안하고 관리가 잘된 골프장이라서 그런가? 싶다가도 쉽다고 점수가 잘 나오는 것은 아님을 알기에 그보다는 한두 홀에서 오비나 양파로 망가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 싶다. 이날은 급조된 라운드였고, 최근에 잘치다 못치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그저 공이나 잃어버리지나 말자는 생각으로 나간 것이었는데 마음을 비워서인지 다 좋았다.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와서인지 안개낀 코스에는 물기로 촉촉했다. 그래도 공이 진흙에 박혀버리거나 그립이 젖어 미끄러지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는데 러프 쪽은 좀 많이 젖어있었지만 아직 풀이 무성하게 올라오지는 않았어서 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양잔디 체질이다 싶었는데 이런 습한 날에는 공이 잠겨버리는 일이 없는 조선잔디가 (비록 가을부터 봄까지 누런 색이 별로지만) 좋다. 엄청난 경치나 전략이 필요한 골프장은 아니고, 대단한 실력을 요구하지는 않아도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은 골프장이다. 다만 (회원권 하나 없는 나같은 서민에게는 상당히 이율배반적으로 들리겠지만) 일요일 오전의 코스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라운드에는 좀 지친다. 곤지암 인근은 유명한 소머리국밥, 막국수 등을 비롯해 맛집으로 가득하다. 뜨내기 손님들 위주라 자극적인 맛이 주류지만 오랜 세월 까다로운 골프장 내장객들을 상대해온 몇몇 식당들은 (가격이야 비싸지만) 꽤 괜찮다. 우리는 길이 막힐까봐 서둘러 먹어야했지만 노곤해진 몸으로 조수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귀가할 수 있었던 것도 행복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