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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에 여기 Livermore에서 묵었음에도 지척에 있는 이 골프장은 제껴놓았었는데 별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평일 오후에도 그린피가 $100이 넘었기 때문 (게다가 비슷하게 좋으면서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Poppy Ridge가 바로 지척에 있음)이었다. Wente Vineyards는 (여기 사람들은 "웬티"라고 읽더라) 엄청 광활한 포도밭이자 130년 역사의 와인 양조장인데 (웬티 와인은 이미 국내에도 수입되어 팔리고 있다) 그 포도밭 사이로 골프장을 만들어놓았으며, 설계자는 Greg Norman이라고 하며, 공동 설계자로 Tad Burnett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렉노먼의 회사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디자이너다. 실은 지난번에 근방의 골프샵에 공을 좀 사러 들어갔다가 거기 프로가 내일은 어디서 치냐고 묻길래 잡담을 좀 나누다가 웬티를 빠뜨리면 후회할텐데? 그런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그럼 이번에는 꼭 가보리라 맘먹은 참이었다.

코스트코에서 수많은 할인이나 쿠폰을 뿌린다는 것은 유명하지만 골프장 쿠폰도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코스트코 사이트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Wente Vineyards 골프장의 2인 $119 쿠폰을 발견하고는 이건 뭐 거의 공짜로구나 그런 심정으로 구매하고 보니 구석에 깨알같은 글씨로 "California Residents Only"...ㅠㅠ 뭐 신분증 확인은 안할 것 같았지만 타고난 새가슴이라 얼른 환불하고는 Golfnow에서 인당 $75 티타임을 잡았다. 막상 골프장에 도달하고보니 와이너리 말고도 엄청 고급스러워보이는 레스토랑도 있어서 (우리는 와서야 들었지만 여기 The Restaurant 식당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라고 함) 비쌀만도 하구나 일단은 좋은 인상이다. 그런데 포도밭 사이로 페어웨이가 이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산과 계곡을 돌아나가는 레이아웃이다. 흔하게 국내에서 보던 스타일이지만 사막의 누런 민둥산이어서 초록의 페어웨이와 극적인 대비가 장관이다.

첫번째 홀은 매우 넓어보이는 페어웨이를 저 밑으로 내려다보며 티샷하는 파 4였는데 넷 모두가 러프로 공을 보내놓고는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ㅠㅠ 이후의 코스는 어떤 식이냐하면, 전략과 정확함이 요구되는 곳이다. 오르막, 내리막과 능선을 따라 돌아가는 홀들도 있었으니 우리나라 골프장들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좁지는 않아서 티샷에 어려움은 적다. 세컨샷부터는 골프백의 거의 모든 클럽을 다 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장관에 즐거워하던 우리는 홀을 거듭할수록 말이 적어지고 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동반자들이 다들 나보다는 잘치는 이들인데 잘 쳤다 싶은 공도 러프나 해저드로 들어가버리니 멘붕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어쩌다 그렉노먼 코스를 가보면 보기보다 어려워서 (아니면 내 취향과 달라서?) 고생하곤 했었다. 용케 페어웨이를 지켰더라도 PGA 투어 중계방송에서나 보았던 수많은 벙커들이 그린을 둘러싸고 방어하고 있다. 이 코스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이라이트는 뜻밖에도 2번 홀에서 나온다. 300 야드 정도밖에 안되는 파 4 홀인데 양쪽의 나무들이 시각적으로 티샷에 부담을 준다. 좁아보이는 페어웨이를 약간이라도 벗어난다면 GIR은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 벙커로 철벽같이 방어된 그린을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땠는가 하면, 두번의 잘 맞은 샷에다가 그린 주변 혹은 벙커에서부터 홀에 들어가기까지 너댓번의 낭패는 아주 행복한 스토리였다.

그밖에도 여기 파 3는 모두가 시그너처 홀이라고 불러줄 정도인데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멋진 풍광이면서도 파를 하기는 정말 어렵다. 7번 홀이 대표적인데 길지만 엄청 내리막이라 어찌 잘 치면 되지 싶어도 결과는 처참했다. 그래도 왼쪽의 포도밭과 오른쪽의 언덕 너머로 보이는 그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죽을 쑤는 스코어에 힘들어하면서도 그래도 조금도 지루해지지 않으니 재밌긴 재밌는 코스였다. 특히 전반이 끝나고 10번 홀로 향하는 오르막은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롬바르드 스트리트를 떠올리게 한다. 300 야드밖에 안되는 10번 홀은 그야말로 도전 아니면 낭패 (유식하게 영어로는 risk/reward라고...)인 파 4 홀이다. 티박스가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장타자라면 이글을 노려볼텐데 동반자들이 죽쑤는 광경을 보면 내가 짤순이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18번 홀도 이 엄청난 (경치로나 난이도로나) 골프장의 피니시로 적당하다. 470 야드의 파 4 홀이니까 버디는 애시당초 포기할 판이지만 가운데 개울을 경계로 페어웨이가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서 장타자라면 좀 짧아보이는 우측을 겨냥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그린과의 사이에 연못을 넘겨야하고, 반대로 왼쪽 페어웨이를 공략하더라도 수많은 벙커로 고생할 각오가 필요하다. 나는 안전하게 왼쪽으로 공략했고, 그린에 가까스로 올라가서 뒤돌아보면 이제야 끝이로구나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려워도 수긍이 가야 좋은 골프장이다. 적어도 "한번 당해봐라.. ㅋㅋ"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을 레이아웃은 (불행하게도 국내에도 이런 곳이 좀 있다) 아니어야 한다. 물론 그 느낌의 플레이어의 실력이나 그날의 컨디션, 티박스의 선택 등등에 따라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좀 공을 치게 되어서인지 Greg Norman 코스도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원래 그의 전성기에 메이저 우승이 적었던 것은 새가슴이어서라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플레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거대한 포도밭을 운영하기 때문에 여기는 가뭄에 대한 방비가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저드에는 물이 가득하고, 페어웨이나 러프나 모두 잘 관리되어 흠잡을 곳이 없었다. 지난번 골프샵 프로의 말대로 Wente Vineyards는 정말 그냥 지나쳤으면 후회했을 그런 골프장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와이너리나 뭐 다른 볼거리에는 관심조차 없다. 골프를 치겠다고 여기에 온 것이고, 거기에 100% 만족했다. 오후에 아울렛에 들른 거랑 (이제는 거의 단골집처럼 되어버린) 오가네에서의 저녁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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