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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분명 전에 가봤던 곳인데 쌩초보 시절에 땅만 팠었을 뿐 코스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질 않아서 다시 가보고자 벼르던 골프장이다. 인근의 태왕사신기 세트장에서 코스를 내려다보았던 기억도 있고, 십년전쯤인가에 워크샵으로 가서 골프텔에서 자고 골프도 쳤었으나 당시는 내가 백돌이를 훌쩍 넘기던 시절이었으니 코스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골프장 천지인 제주도에서도 좋다고 소문난 곳이고, 송호 디자인에서 만들어서 36홀로 개장했는데 세인트포 코스와 세인트프레드 코스를 구분하던 것이 지금은 9홀씩으로 끊어서 Cielo/Bosco/Mare/Vita 코스로 나눠놓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저런 네이밍이 하나도 멋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세인트포 코스가 지금의 씨에로/보스코 코스이고, 마레/비타 코스가 세인트프레드 코스다. 듣기로는 세인트포 코스가 벤트그라스 페어웨이에 공을 많이 들인 곳이라 하며, 켄터키 블루그라스를 심은 세인트프레드 코스는 길고 어렵게 조성했다고 한다. 예전에 내가 어느쪽 코스를 돌았는지 기억에 없지만 잔디부터 완전히 다른 골프장이니 어느쪽이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날 우리는 청명한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씨에로 코스를 시작으로 돌게 되었다. 제주도에 그간 종종 와서 골프를 쳤지만 날씨가 좋았던 기억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여서 한껏 기대에 부풀 수밖에 없었다.

세인트포는 어제의 에코랜드와 완전히 반대의 풍광이다. 드넓은 평야지대라 여기가 한라산 자락임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야자수인지 뭔지 열대식물이 늘어서 있어서 제대로 휴양지 리조트에 온 기분이 난다. 이런 느낌은 국내에서는 제주도의 몇몇 골프장 말고는 느끼기 힘든 것이라 세인트포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그런데 이 골프장이 최근 퍼블릭이 되어버려서 그런지 홀을 거듭할수록 뭔가가 이상하다. 분명 이국적인 제주도 풍경을 살린 리조트 코스인데 한참동안이나 관리없이 방치된 느낌? 무뚝뚝하고 얼굴에 "나 힘들어요ㅠㅠ" 이런 표정이 가득한 직원들도 보는 입장에서는 편하지 않았다. 평평한 레이아웃과 야자수 등등 거기에 군데군데 말라있는 양잔디 페어웨이까지 전형적인 미국이나 동남아의 퍼블릭이 연상된다. 러프도 짧게 깎아놓아서 티샷의 부담도 없다. 돈이 떨어졌는지 모르겠으나 올 여름이 유난히 더웠던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멀리까지 와서 즐겁게 골프치기에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아무튼 좋은 날씨에 좋은 코스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이니 불만은 없다. 어찌 보면 리조트 코스는 이래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PGA 투어 세팅 따위는 모처럼 놀러와서 하루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는 이들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사람도 많았다. 클럽하우스도 붐볐고, 거의 모든 홀에서 티박스에 가면 앞의 팀이 막 티샷을 마치는 식이었다. 제주도에서 좀 기묘한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밀리지도 않고 스무스하게 4시간 반에 끝났는데 우리나라 골프장에서 이정도면 준수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코스의 상태는 불만이지만 공이 그럭저럭 맞아주어서 예전에 왔던 때보다 몇배는 더 즐거웠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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