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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년 남짓한 구력에, 국내에서도 벌써 100군데가 넘는 골프장에 가보았다. 몇년전부터 불경기의 여파로 많은 회원제 코스들이 퍼블릭으로 전환하거나 일반 비회원 부킹에 관대해졌지만, 아직도 서울 근교에는 나같은 사람은 아예 접근도 불가능한 회원제 코스들이 남아있다. 반면에 조금만 지방으로 나가면 야심차게 만든 골프장이 회원권을 제대로 팔지 못해서 아니면 운영이 어려워서 퍼블릭 부킹을 남발하는 곳도 생기는 것이다. 청주 인근의 이븐데일 컨트리클럽은 Dye 디자인에서 우리나라에 만든 골프장들 (아시아드, 우정힐스, 비전힐스)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아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곳으로 유명한데 특히 골프 쫌~ 친다는 친구들이 갔다가 순식간에 백돌이로 전락하고는 마구 욕을 해대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었다. 지금은 퍼블릭 부킹도 열심히 받고, 프로모션도 자주 하는 곳이지만 이런 곳이 회원제라니 회원권 판매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가뜩이나 어려운 코스를 추구하는 Cynthia Dye McGarey의 취향에다가 우리나라의 험한 산세가 더해졌으니 과연 어느 정도일까? 늘 궁금하던 골프장이다.
언제부턴가 골프 부킹을 대행해주는 xgolf 등의 사이트나 카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해서 편리했는데 점차 골프장 입장에서도 머리가 돌아가는지 회원제 코스들도 홈페이지에서 소위 "인터넷 회원"을 직접 모집하기 시작했고, 이마저도 귀찮으면 그냥 경기과로 전화를 걸면 친절하게 부킹을 도와준다. 심지어는 퍼블릭 내장객을 받지 않는다고 알려진 곳들도 막상 전화해보면 비회원 티타임을 (물론 할인은 기대하기 어렵다) 배정해주는 경우가 있으니 밑져야 본전 식으로 시도해볼만 하다. 그러므로 주말 부킹에 제한을 둔다든지 유료회원에게만 부킹을 도와준다든지 말도 안되는 배짱을 (아직도) 부리는 모모 사이트는 망하지 않으려면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아무튼 좋은 시기에, 좋은 동반자들과 이븐데일을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는 거의 청주까지 중부고속도로를 내려가 증평 ic를 나와서도 국도를 한참을 타야하는, 서울에서의 접근성은 거의 강원도 홍천이나 원주까지 가는 수준인데 그래도 그쪽이 직장인 친구들과 금요일 오후에 만나서 치는 날이라 나름 적당한 장소였다. 지난 주의 비로 오랜 가뭄은 이제 해결된 모양이니 감사할 일이지만 공치러 가는 입장에서는 몇번이고 골프장으로 전화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비는 조금 내리는데 다들 정상적으로 플레이하고 계셔요" 이런 대답에 일단 갔는데 도착한 당시에는 거의 비는 그친 (듯이 보이는) 상태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내다보니 가뜩이나 양잔디 상태가 좋다고 소문난 이븐데일이니 멀리서 바라보는 페어웨이는 감격적이다. 불과 몇달전에는 매일 아침 무심코 지나치던 직장 주차장에서 건물까지의 길에서 벚꽃은 이미 져버렸으나 그 아래의 잔디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변하는 광경을 보면서 괜히 울컥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여름의 골프장에 와보니 더위와 습도에 허덕대게 된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 첫 홀의 티박스에서부터 저 위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페어웨이를 바라보면 이거 오늘은 힘 좀 들어가겠군 걱정이 앞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코스는 "타겟" 골프여서 길게 느껴지지는 않아도 샷의 정확도가 스코어에 그대로 반영된다. 심한 경사의 산자락을 따라 페어웨이가 만들어져 있어서 왼쪽의 비탈에 맞은 공이 주르륵 흘러내려가 페어웨이를 지나 오른쪽 러프까지 내려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경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속리산인지 무슨 산인지 몰라도 탁 트인 경치가 엄청나다. 설계자는 어쩌면 만들어놓고 뿌듯했을런지 몰라도 문제는 이런 식의 코스는 이미 우리나라에 흔해빠졌다는 것. 2010년에 개장했으니 아직 명문 소리를 들을 처지는 아닐텐데 기존의 골프장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인지 들인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여기저기 매체에서 굉장히 좋은 평가를 들었던 곳이다. 반면에 실제로 부푼 기대를 품고 찾아가본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뭐 이따위를 골프장이라고 만들어놨어? 에이, 퉤~ 하는 반응이었다. 이천년대 초반에는 (나는 그 시기에 골프를 치지 않았으나) 어려운 코스=명문 이런 인식이 있었는지 생기는 골프장마다 다 난이도 경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세간의 평가와 서울에서의 접근성 탓인지 몰라도 인터넷에는 금요일 오후인데도 몇만원대 그린피 프로모션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카트비와 그늘집 식사, 캐디피를 더해서도 인당 십만원도 안 들었으니 이래서는 코스에 대해 불평하면 나쁜 놈이다.
그런데 실은 싼 가격이 안타까울 지경으로 좋은 코스다. 좋은 골프장이란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달라질 뿐만 아니라 매우 주관적이기도 한데 (역사와 전통, 접근성 뭐 그런 골프 외적인 요소를 뺀다면) 뛰어난 설계자의 철학이 잘 반영된 코스 구성, 철저한 관리, 경치 등의 면에서는 이븐데일은 사실 최고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골프잡지 등의 "베스트 코스" 선정에는 아마도 골프 외적인 바이어스가 들어갈 것으로 짐작되지만 뽑히는 골프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된 좋은 곳들이다 (다만 우리나라 골퍼들은 하도 좋은 곳에서만 치니까 그런지 코스가 얼마나 훌륭한지 잘 모른다). 초보자에게는, 어차피 매 홀마다 공을 잃어버리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에만 급급한 상황에서는, 이븐데일이나 어디 동네의 퍼블릭 코스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골프장에 대한 나쁜 평가는 아마도 80대 후반 정도를 치는 보기 플레이어에게서 나오지 싶은데 나름 샷에 대한 자신감도 좀 있고 그랬는데 괜찮게 쳤다고 생각했음에도 오비가 나거나 양파를 하게 되면 황당할 심정도 이해가 간다.
물론 나도 18홀 내내 헤매고 다녔다. 비에 젖은 그립에는 힘이 더 들어가지만 어차피 설계자가 만들어놓은 페어웨이의 함정까지는 공이 가지도 않는 짤순이니까 티샷에서는 괜찮았다. 그린으로 바로 올릴 도전도 포기했더니 공도 많이는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래도 백돌이 골프를 쳤긴 한데 티샷마다 엄청난 비거리로 날아가서는 오비가 되어버린 동반자들보다는 훨 나은 라운드였다. 아무튼 우리는 골프장과 설계자를 씹어가며 홀마다 그린을 향해 샷을 한다. 어쨌거나 공은 (비록 벌타를 받고 타수를 세기도 힘들 지경이어도) 결국에는 홀컵에 들어가기 마련이고, 편한 동반자들이니까, 심각하지 않으니까 그저 웃으면서 즐기는 라운드였다. 즐거운 18홀을 마치고 나니까 아까까지는 뭐 이런 골프장을 잡았어? 어디 천룡이나 좀 좋은 곳으로 할걸ㅡㅡ 쩝.. 하던 기분이 완전히 달라져버려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다.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에 마지막 세 홀을 포기해야 했지만 덕택에 나중에 다시 가볼 핑게가 생겼으니 그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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