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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좀 덜하긴 한데 최근까지도 내가 골프치는 목표중 하나는 새로운 코스 콜렉션이었다. 거기를 왜가냐 다들 그러는 코스도 안가봤으니까 간다며 부킹을 잡았고, 덕분에 경기도에서는 안가본 골프장이 없을 정도였다. 퍼블릭은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내가 직접 티타임을 잡았고, 회원제는 (감사하게도) 기다리다보면 주변에 회원권을 가진 이들이 나타나곤 했다. 사실, 요즘에는 퍼블릭 골프장들이 돈을 더 버는 시대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폐쇄적이고 고급스런 회원제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여전히 초고가의 회원권 시세를 자랑하는 몇몇 중에 하나가 곤지암의 이스트밸리 컨트리클럽이다. 이스트밸리와 함께 한때 곤지암의 3인방으로 통하던 남촌, 렉스필드 등은 회원을 통하지 않고도 부킹할 길이 어쩌다 한번씩은 생기곤 했는데 여기만큼은 여전히 회원을 동반해야만 가볼 수 있다. 2001년에 개장한 코스임에도 Gary Roger Baird가 설계했으니 시대를 앞선 골프장이었고, 회원제 골프장들이 우수수 몰락해가는 지금도 최고의 코스로 남아있는 곳이다. 여기 회원인 내 지인은 사실 근래에는 골프를 거의 치지 않지만 어쩌다 한번씩 나랑 한나절을 보낼 목적으로만 부킹을 한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뿐. 겨울에도 가보았고, 땡볕 아래에서도,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치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모처럼 흐리고 선선한 날씨여서 사진을 많이 찍었길래 글을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조선잔디가 깔린 우리나라 골프장은 5/16부터 10/26까지라는 말이 있으니 6월 중순이면 최적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곤지암 시내를 지나야했는데 이제는 바로 근처로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생겼다. 이스트밸리 표지판을 따라 시골길을 조금 올라가면 생각보다는 소박하게 보이는 클럽하우스가 나타난다. 여느 골프장처럼 차를 대고는 백을 내리고, 주차장의 빈 자리를 찾아 주차한다. 과한 서비스에 기가 죽는 해슬리 나인브릿지 수준은 아니어서 편안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식사. 이날도 우리는 동/남 코스의 순서로 돈다. 참고로 이스트밸리의 27홀 중에서 서코스는 원래 퍼블릭으로 만들어진 코스라고 하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여름에는 좀 시원하면서 쉬운 편이라고 한다 (수차례의 방문에서 서코스는 딱 한번밖에는 쳐보지 못함). 어느 코스로 시작하건간에 첫번째 홀은 시원스럽게 페어웨이를 내려다보게 디자인되었는데 설계자가 누구냐를 떠올리기 어렵게 그저 아름다운 우리나라 산악지형 코스의 전형이다. 솔직히 이 골프장에서는 모든 홀들이 제각각 특색있고 아름답다. 극적인 경치는 물론 파 3 홀들에서 나오는데 동코스 4번에서 보이는 호수에 외롭게 떠있는 돛단배 등은 골프와 하등 관련이 없을 조경이지만 앞팀의 플레이가 밀리더라도 한참을 지루함없이 바라보게 한다. 자타공인 가장 어렵고도 재미있는 홀은 아마 남코스 2번일 것인데 티샷을 언덕너머로 보낸 후에 호수를 넘겨 투온에 도전하거나 좌측으로 돌아가서 안전한 파를 추구하느냐 고민하게 만드는 멋진 롱홀이다. 한편, 그렇게 평탄한 지형은 아니었어도 긴 티샷의 캐리를 요구하거나 어프로치를 방해할만한 설계도 아니어서 경사가 보기보다 심하고 빠른 그린만 아니라면 스코어도 나쁘지 않을 골프장이었다. 샷들이 다 괜찮았는데 왜 더블보기가 되었지? 허허 그렇게 기분좋게 그린을 벗어날 수 있다. 골프장에 들어가는 초입에서부터 고급스럽지만 요란하지 않았고, 화려한 코스는 아니지만 잘 정돈된 홀들에 그린이나 페어웨이나 흠잡을 곳이 없다. 골프가 초호황기인 요즘에도 많지 않은 내장객들은 다들 점잖아보였고 (그늘집이나 사우나에서 연예인들을 종종 본다), 응대하는 직원이나 캐디도 괜히 오버하는 기색없이 친절하고 스무스하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스트밸리는 또한 맛집이기도 하다. 여기 식당이나 그늘집의 메뉴는 (가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하나 다 맛있다. 심지어는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최상급 한우를 구워먹을 수도 있다. 물론 자기 돈으로 여기서 밥먹고 골프치고 그럴만한 직장인은 별로 없을 것이고,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흙수저 집안에서 자라서 이제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 정도는 하게된 사람인데 나이가 좀 들어서야 고급 식당에도 가보고 골프도 배우고 그랬다. 회원권은 살 여유도 생각도 없으나 내가 골프를 시작한 시점이 대중 골프장이 대두되기 시작한 (스카이 72가 개장한 것이 2006년이고, 내가 머리올린 시기가 2010년쯤?) 때였다. 폐쇄적이던 컨트리클럽들이 퍼블릭으로 전환되고 여기같은 고급 회원제에도 방문할 기회가 내게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부자들의 놀이터가 사라져가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어보인다. 평등한 사회라지만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면 있는 사람들에게 잘난 맛을 느낄, 돈쓰고 우쭐할 대접을 받을 구석은 허용하는 것이 맞다. 한편 (아직은)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부족한 이들이라면 더 노력해서 저들 가운데에 끼고싶다는 유치한 꿈이라도 꾸게해주는 사회가 건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좋은 시절에, 좋은 골프장에 모처럼 와서는 마치 사회 초년생 시절에 처음으로 격식차리는 모임에 불려나간 기분이 들어서 적는 뻘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