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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골프장

레인보우힐스

hm 2021. 7. 3. 05:56

이제 내 구력도 십년이 넘었는데 다녀본 골프장 갯수로 치면 (이 짓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을 빼면) 누구보다도 많을 거라고 자부한다. 골프장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굳이 순위를 매길 것까지는 없다고 보지만 대충 세상에는 아주 훌륭한 몇몇, 그저 괜찮은 대다수, 그리고 보통인 골프장들이 있다는 정도는 알겠다 (아주 후지다고 생각되는 곳은 다행히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가끔 사람들이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이렇게들 묻곤 하는데 나는 뭐 우리나라 골프장은 다 괜찮죠 뭐, 가평베네스트도 좋고... 정도로 대답한다. 어디가 가장 어려웠냐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있는데 둔내의 웰리힐리 남코스 아니면 충북 음성의 레인보우힐스다. 두 코스가 모두 Robert Trent Jones 2세가 설계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그가 설계한 코스들이 이제 많아졌지만 유독 여기가 더 어렵다. 왜 어렵냐고 물어보면 딱히 대답이 떠오르지도 않아서 그냥 한번 가서 쳐보세요 그러는 수밖에 없다. 실은, 골프장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을 것이다. 티박스에서 공이 떨어질만한 위치에 계곡을 파놓는다던가 페어웨이를 좁히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식의 코스들이 (굳이 언급하기 싫다) 우리나라에도 몇몇 있다. 골퍼들을 골탕먹이겠다는 심정으로, 혹은 극단적인 타겟골프를 추구해서 티샷은 미들아이언으로만 가능하게 하고 거기서 그린까지는 페어웨이 우드로만 올릴 수 있는 레이아웃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욕만 먹을 것이다. RTJ나 잭니클라우스의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송호나 권동영 씨의) 코스는 어려우면서도 도전과 안전함을 추구하는 이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도록 고심하여 설계된다. 물론 설계자의 의도에 맞추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레인보우힐스는 처음 개장했을 당시에는 지금의 해슬리웰링턴 수준으로 배타적이고 고급스런 회원제여서 나같은 서민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던 골프장이었다. 나는 여기가 회원제였던 시절에 운좋게도 누가 초대해줘서 몇번 라운드를 했었고, 고급스럽고 한적한 클럽하우스의 분위기와 어려운 코스에도 압도당했지만 그보다 거의 프로선수 전속캐디의 수준으로 전문적으로 공략과 샷을 조언해주던 캐디에게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를 초대해주셨던 분은 이런 첩첩산중에다가 이렇게 되먹지도 않게 골프장을 만들어놓고 회원권을 비싸게 팔아먹네 어쩌네 툴툴거렸었다. 이해는 충분히 되었던 것이, 초고가의 회원권을 구입하는 이들이 원하는 코스는 이런 식이 보통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회원들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모회사인 동부그룹의 어려움 탓이었겠지만 아무튼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누구라도 가볼 수 있는 퍼블릭이 되었고, 웬만한 경기권 골프장들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인터넷 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내 최애구장이 되어 여러차례 갔었는데 잘친 날보다는 실망하고 돌아선 날이 더 많았지만 코스에 대한 불만은 언제나 없었고, 내장객들이 좀 많아진 것 말고는 달라보이는 것이 없었다. 조명을 설치하거나 하지도 않아서 한편 다행이었는데 다만 잔디의 관리상태는 최고급 회원제 시절만큼은 아닐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KLPGA 여자오픈이 개최된 직후라서 대회수준의 컨디션을 기대하고 갔지만 반면 훨씬 더 어려울 것을 감안해야 했다. TV에서 보니까 대회는 남코스로 시작해서 후반에 동코스를 돌던데 이대로 쳐보려면 동코스로 예약해야한다.

나는 골프장에 가본 소감을 남길 목적으로 이 블로그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홀들을 열거해가며 안내하는 식으로는 보통 적지 않는다. 느낌을 적고는 그 아래로 사진들을 그냥 주욱 붙여놓는다. 그래도 레인보우힐스는 홀들 하나하나에 이야깃거리가 많다. 시그너처 홀이라고 불릴 홀들은 동/남 코스에 많지만 투그린에 좀 짧은 서코스에도 멋진 홀들이 있다. 물론 어디나 다 어렵다. 레인보우힐스에서는 해저드보다는 벙커가 낫다는 심정으로 쳐야한다. 보통 버디는 롱홀에서 비교적 쉽게 나오고, 파 3는 그저 파만 해도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쳐야하는데 여기는 쉬운 홀이 없다. 그중에서도 서코스에서 가장 어려운 홀을 꼽으라면 8번이 될 것이다. 티박스에서 그린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 우측 도그렉인데 티샷이 잘 갔더라도 저멀리 물을 넘겨 높게 솟아있는 그린으로 어프로치한다. 뒷쪽의 폭포가 근사한데 퍼팅을 끝낼 때까지도 여기에 폭포가 있었나 정신없는 경우도 생긴다. 서코스에서는 여기만 원그린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그린의 입구에는 벙커가 있으니 핀의 위치에 상관없이 무조건 긴 클럽을 잡게 된다. 그러나 어프로치가 너무 길어도 안되는 것이, 뒷쪽의 폭포로 공이 들어가버릴 수도 있다. 아무튼 투온이 정말 어렵게 의도된 홀이다.

동코스는 시작부터 어려운 파 5로 시작한다. 여기서는 무조건 티샷이 멀리, 똑바로 가야하는데 세컨샷으로 그린에 올릴 의도가 없더라도 중간에 카트길과 계곡으로 페어웨이가 나뉘어져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샷으로 가능한한 계곡 가까이 공을 보내놓아야 온그린에 무리가 없다. 동코스로 시작한다면 시작부터 심상치않은 코스라는 것을 곧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동코스 3번이 아마 레인보우힐스를 상징하는 대표 홀로 꼽힐 것이다. 페어웨이를 좌우로 나눈, 속칭 한반도 홀인데 심한 내리막이기 때문에 화이트티에서라면 웬만하면 좌측 페어웨이로 공을 보낼 수 있고, 거기서라면 100미터 이내의 어프로치가 남는다. 돌이켜보면 짧고 쉬운 홀인데 대개는 힘이 들어가곤 한다. 한편, 상벌 (risk/reward)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홀이 동코스 5번이다. 사선으로 길게 뻗은 물길을 넘겨 티샷을 하는데 안전하게 페어웨이 좌측으로 보내고는 포온이라도 하자 결심하면 그럭저럭 가능. 장타자일수록 우측 페어웨이를 겨냥할 것인데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갈 상황에서 공이 페어웨이로 갔다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일 것이다. 오직 티샷이 죽지 않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거기서부터는 그냥 오르막일 뿐이고, 그린 좌측에 조그마한 벙커가 있을 뿐 크게 어려운 홀은 아니다. 이어지는 동 6번은 (엄청나게) 심한 오르막 홀이다. 산악지형이 흔한 우리나라 골프장이지만 이렇게나 급격한 오르막이 있었나 싶게 가파르다. 카트를 타야지 생각으로 페어웨이 우측을 노리면 그린이 보이지 않고, 좌측에서 어프로치하면 보통 카트가 떠나버리고 오르막을 걸어올라가게 되는데 그린에 다다르면 숨이 멎을듯이 힘들다. 내가 생각하는 동코스 최고의 홀이 그다음 7번인데 좌에서 우로 휘어지는 더블 도그렉 파 4 홀이다. 좁아보이지만 크게 어렵지 않은 티샷을 마치고 나가보면 그린 우측까지 이어진 해저드가 눈에 들어온다. 컨디션이 좋은 날이라면 그린을 노려보는데 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벙커행일 가능성이 높아서 나는 안전하게 레이업후 쓰리온을 선택하곤 했다.

남코스도 시작은 내리막 파 5 홀로 시작한다. 좁고 저 아래에 대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티샷을 해놓으면 그래도 우측 도그렉을 타고 그린이 보이니까 동 1번에 비하면 훨씬 부담이 덜한 홀이다. 압권이 2번 홀인데 티박스에서 바라보면 시원스런 폭포 너머로 좌측 페어웨이가 있고, 그쪽으로는 화이트티에서도 240미터는 쳐야한다고 한다. 우측 페어웨이로 가는 것이 아마추어의 정석이긴 한데 비스듬한 라이에서 상당히 멀리 어프로치샷을 해야한다. 오르막에다가 그린 앞쪽의 벙커를 넘기려면 넉넉한 클럽을 잡아야하고, 라이가 나쁘다면 차라리 짧게 끊어가야할 것이다. 남코스 3번은 파 3 홀인데 아래 사진에서처럼 그린 우측의 바위를 공략하는 것이 정석이다. 우측으로 보내면 공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투온이 가능해지고, 그린을 바로 노렸다가 자칫 짧거나 왼쪽으로 가면 타수를 많이 잃는다. 힘겨운 라운드지만 그나마 숨을 돌리면서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파 3 홀들인데 여기서의 경치도 아주 좋다. 어디를 바라봐도 다 절경이지만 레인보우힐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홀로는 남코스 6번이 거론된다고 한다. 그린 뒷편으로 마치 독수리가 날아가는 모습인 클럽하우스가 보여서 그런 모양인데 여기를 9번으로 해놓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클럽하우스 앞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선남선녀들이 와인잔을 들고서 코스를 내려다본다면 근사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레인보우힐스에서 가장 긴 파 5 홀이 남코스 7번이다. 호수를 우측에 두고는 빙 돌아가는 식이라 꽤나 흔한 디자인인데 장타자가 물을 넘겨서 투온을 시도할 수 있게 그린의 우측에 여유공간을 충분하게 만들어두었다. 나같은 경우에도 세번으로 잘라가려면 세컨샷을 웨지로 레이업해야해서 투온 욕심이 나곤 했지만 매번 물에 공을 빠뜨리곤 했다. 긴 홀이긴 해도 아마추어라면 롱아이언 두번에 웨지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어려워서 매번 멘붕을 겪곤 했지만 그저 코스를 즐겨보자 마음을 고쳐먹으면 정말 아름답고 재미있는 코스여서 내 기준으로 우리나라 골프장으로는 단연 탑에 꼽는다. 이제 초록이 완전하게 올라온 페어웨이에 푸른 하늘, 그리고 맑은 호수의 대비는 사진으로 도저히 표현이 어려울 수준이다. 게다가 RTJ 코스도 이제는 좀 경험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내 실력이 늘어서인지 그럭저럭 칠만해졌다. 내가 처음 겪었던 그의 코스가 시카고 북쪽의 Thunderhawk였는데 어려울 줄 각오했었지만 상상했던 이상이었고, 이후에 국내의 오크밸리글렌로스 등에서도 멘붕을 겪어봤어도 드라마틱한 코스를 만드는 능력에서는 과연 일인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코로나 사태가 끝난 후에 내게는 버킷리스트가 한줄 더 생겼는데 미국 앨라바마에 있는 RTJ Golf Trail (주정부에서 관광진흥 목적으로 로버트 트렌트 존스에게 의뢰하여 곳곳에 골프장들을 만들어놓고 대중에게 개방하였음) 일주를 해보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투그린을 쓰는 서코스의 모습


한국여자오픈 마지막날 극적인 승부가 갈렸던 동코스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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