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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무슨 골프장 순위 이딴 기사에 몇년전부터 1위 아니면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있는 웰링턴 cc에 운좋게도 몇번 가본 입장에서 내 평가(랄까 느낌)는 좀 양면적이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할 좋은 골프장임은 분명한데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인데 오늘은 그 소감을 적어보려고 한다. 모처럼만의 웰링턴이고, 늘 잔디가 누렇던 시절에만 기회가 났다가 이번에는 모처럼 성수기 라운드라 예전과는 평가가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골프장에 순위를 매기는 행위는 중고딩 시절에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어쩌고를 놓고 친구들과 말다툼하던 수준을 떠올리게 한다. 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한 중에서도 좋은 코스들이 많고, 골프장의 경험은 코스나 클럽하우스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등수매기기 놀음이 사실 우스운 일이지만 순위에 오르내리는 곳이라면 적어도 코스에 대해서만큼은 불만이 생기기 어렵다.
웰링턴은 효성그룹이 경기도 이천에다가 만든 27홀 회원제 골프장인데 주변에 사우스스프링스, 비에이비스타, 써닝포인트, 뉴스프링빌 등등이 있는 입지니까 결국 같은 산이다. 초청을 통해서만 회원을 선정하는 식이고, 처음에 Raymond Hearn과 송호디자인에서 함께 설계했다가 회장님 맘에 들지 않아서 노준택 씨에게 다시 의뢰해서 몇몇 홀을 고친 뒤에야 개장했다고 한다. 여기 이런 골프장도 있었나, 지금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런 배타적인 회원제에는 그저 가볼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가야하는 법인데 법인회원권을 발행하지 않았고, 회원과 동반해야만 라운드가 가능하기 때문에 기회가 자주 오지는 않는다. 주변에 (돈많은) 회원이 있어야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내가 같이 골프를 치고싶을 정도의 인맥이 되어야 가능하니 사실 감사할 일이겠다. 예전에 누군가가 온갖 나라의 스탬프로 빼곡한 내 여권을 보면서 자기 소원이 "출장을 빙자한" 해외여행,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앉아서라고 얘기했는데 나는 당시 별게 다 소원이구먼 그렇게 흘려들었었다. 반면 내 젊은 시절의 꿈이라면 (당시 나는 골프를 치지 않았음에도) 검정색 고급 승용차 뒷자리에서 내려서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걸어들어가는 그런 유치한 광경이었는데 얼추 비슷한 코스프레를 하면서 살고 있다.
몇년전에 처음 방문했을 당시부터 그리핀/휘닉스 코스를 돌았는데 나중에 (노준택 씨의 설계로) 추가된 와이번 코스가 이 골프장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라고들 했고, 다만 유독 와이번 9홀이 어렵게 설계된 탓에 회원들은 그리핀/휘닉스의 조합을 선호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나중에 9홀이 추가된 탓에 27홀 코스에서 난이도 조정에 실패한 거라고 보는데 나는 수차례의 라운드에서 시종일관 그리핀/휘닉스만 돌았고, 아마도 초대해주신 회원이 와이번 코스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아무튼 골프장 순위의 탑에 올라가는 조합은 와이번/그리핀이다). 이 골프장의 잔디도 좀 특이했는데 페어웨이에다가 조선잔디를 주종으로 심고, 가을이 되면 양잔디인 라이그라스를 오버시딩해서 사철 초록색을 유지한다고, 말은 그렇게 한다. 어차피 겨울에는 누렇게 변하고, 열심인 관리 덕택에 그렇게 티나지는 않지만 페어웨이를 밟는 느낌은 그냥 조선잔디 골프장이다. 조선잔디가 싫다는 것은 아닌데 (Zoysia 종에 속하는 우리나라 중지는 더위와 습기에 잘 견디는 특성으로 점차 미국 플로리다 등의 골프장에도 많이 도입된다고 한다) 이정도 관리를 하는 명문 코스라면 벤트그라스 페어웨이여야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각각의 코스가 클럽하우스에서부터 나갔다가 들어오는 형태 또한 전형적인 한국식 디자인이다. 으리으리한 클럽하우스에서 지극정성 직원들의 서빙을 받으며 아침을 먹은 우리는 그리핀 1번부터 시작했다.
와이번 코스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치는 18홀은 그렇게까지 어렵게 플레이되지 않았다. 주변의 산세도 흔하게 보는 우리나라 경치였다. 처음 두 홀들에서 그럭저럭 파와 보기를 하고서는 마침내 마주친 그리핀 3번은 이거 어디서 봤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좌측 도그렉 파 4 홀이다. IP 지점으로 공을 잘 보내면 저 내리막 아래에 그린이 보이는데 맘에 드는 경치다. 비슷한 홀을 Crumpin-Fox와 Pasatiempo에서도 겪어보았던 것 같은데 그린 주변으로 엄청난 벙커가 둘러싸고 있어서 어마어마한 풍광이었다. 이어지는 4번과 5번 홀들도 어라? 싶게 (멋있긴 한데) 어디에선가 봤었는데 싶은 디자인이다. 스코어도 그럭저럭 나오고 재미있게 치지만 이거 생각보다는 뻔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코스보다는 후반으로 넘어가기 전에 들르는 클럽하우스 그늘집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무슨 고급 바처럼 꾸며놓았고, 메뉴에 피자나 칵테일이 있었다. 밀리는 틈을 이용해 막걸리에 순대 한접시를 해치우는 그런 식은 적어도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 회원들은 골프치다가 지치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늘집에서 먹다가 졸다가 다시 나가는 모양. 웰링턴은 골프보다는 휴식과 사교를 추구하는 곳이로구나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후반의 피닉스 코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공이 생각처럼 맞아주니까 슬슬 주변의 경치를 즐기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워터해저드가 무시무시한 피닉스 4번 홀이 특히 장관인데 5월 이후가 되면 정말 아름답겠구나 싶었다. 레이크사이드 남코스가 연상되는 마지막 (피닉스 9번) 홀도 장관이었는데 전체적으로 튀지 않는 코스를 지향했다는 느낌이다. 산에 있지만, 심한 경사는 주로 내리막 홀들이어서 걷기도 편했다. 그러고보니 원래 송호 씨의 디자인이 어떠했을지, 더 어려웠는지 아니면 너무 편안해서 노준택 씨에게 손보도록 했는지도 궁금해졌다. 아일랜드 파 3 같은, 좀 극적인 홀도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애초에 여기는 골프실력을 겨루는 목적이 아니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와이번 코스도 한번 돌아보면 내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웰링턴이라는 이름은 "신이 축복한 신성한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Wellington에 대체 어떻게 저런 의미가 숨어있을 수 있는지, 그냥 영국 어디쯤의 시골마을 이름에서 따왔을 것 같아 이해는 안 가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반면 내 느낌은 잘 만들고 잘 관리되는 골프장에 운좋게 기회가 닿았구나 정도다. 자수성가한 부자가 유서깊은 가문들이 모여사는 동네에다가 으리으리한 새 저택을 지어놓고는 우리도 이제부터는 명문가다 자기만족하는 느낌이었다. 소수에게만 문이 열려있는 고급 회원제라서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겠지만, 높은 문턱과 가격을 제껴두고 코스만을 놓고 본다면 그저 아름답고 편안한 골프장이었다가 내 평가. 극진한 서비스는 (여기가 호텔이나 술집이 아니라 골프장이기에) 솔직히 나같은 서민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예전에 갔을 당시에는 비회원 그린피를 상당히 비싸게 받아서 좋았던 기분을 (끝내고 계산하면서) 살짝 망쳤던 기억이 있다. 기껏 소수의,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간으로 꾸며놓았으면서 (접대받으러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게스트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식은 좀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의 불평이 아니었는지 이번에는 비교적 저렴한 액수를 치렀다 (골프장이 바보는 아니니까 아마도 회원에게 조금 더 부담을 시켰을 것이다).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어디서나 당당한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아직도 이런 곳에 오면 주눅들고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