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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산요수 웰니스카운티 (혹은 무릉도원 관광단지)였다. 국내 최초로 회원제로만 이루어진 54홀 골프리조트로 요수/요하/요산 이렇게 3개의 18홀 정규 코스에 페어웨이 빌라, 한옥호텔, 레저시설 등을 갖춘 럭셔리 타운을 춘천 인근에 조성한다는, 좀 심하게 원대한 포부였는데 아무튼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골프장 설계회사로 오렌지 엔지니어링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IMF 이전의 호황기부터 상당히 잘나갔던 모양. 이 회사를 이끌던 두 명의 공동대표가 안문환 씨와 권동영 씨였는데 (남의 의뢰만 받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본을 유치해서 골프장을 만들 생각까지 한 것이다. 권동영 씨는 속리산 인근에 오렌지 cc를 만들었고 (자기 회사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지만 결국 지금의 블루원 상주가 되었다), 안문환 씨는 훨씬 더 큰 계획으로 산요수 리조트를 기획했었다. 요수 코스는 안문환 씨가 직접 설계했고, 요산과 요하 코스는 각각 Tom Weiskopf와 Kyle Phillips에게 맡긴다고 했었으니 일이 잘 풀렸다면 정말 엄청난 곳이 되었을 산요수 프로젝트는 결국 요수 코스와 한옥 클럽하우스만을 남긴 채 (시공사였던) 코오롱에 인수되어 라비에벨 (La Vie est Belle) 골프 & 리조트라는 희안한 이름의 퍼블릭 골프장이 되었다.
당시는 그렇게 시중에 돈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주가와 집값이 하늘을 찌르고, 마침 경춘고속도로가 건설중이어서 가평에서 강촌, 춘천에 이르는 일대에 고급 골프장들이 무더기로 건설되면서 회원권이 비싼 가격으로 분양되던 시절이다. 저마다 자기네가 최고의 신흥 명문이다 광고하며 지어진 골프장의 상당수는 그러나 결국 부도를 내면서 시공사가 울며겨자먹기로 떠안아야 했고, 몇몇은 그럭저럭 회원제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대다수는 대중제로 개장했다. 산요수 웰니스카운티는 라비에벨로, 엔바인 리조트는 더플레이어스로, 엠스클럽트룬은 오너스 cc로 이름까지 바꾸었는데 그나마 원래의 명칭을 유지하는 파가니카 cc, 클럽모우, 남춘천 cc 등도 있다. 대부분 현재의 주인은 시공에 참여했던 건설사들이다.
뭐 골프장 하나의 사정이야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아무튼 근사한 대중제 골프장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처음 개장했던 당시에는 경춘고속도로 끝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했는데 지금은 남춘천 ic를 나와서 좌회전하면 골프장까지 가는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이 터널도 오직 라비에벨만을 위해 뚫은 것으로, 코오롱이 투자는 많이 했다고 본다. 터널을 지나 골프장 입구에 다다르면 먼저 (나중에 송호 씨의 설계로 만들어진) 듄스 코스가 눈에 들어오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으리으리 한옥집인 올드코스의 클럽하우스가 나온다. 코오롱 골프장들이 맛있는 식사로 유명한데 나는 개장한 당시부터 한동안 열심히 다녔었지만 언제부턴가 부킹이 어려운 것으로 악명을 떨친 (매크로 부킹이니 예약대행이니 문제점이 제기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대표적 골프장이 되었다. 클럽하우스부터 고급스러우면서 코스까지 근사하니까 인기있을만도 하지만 부킹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생겨서 내 머리속에서 잊혀져갔다.
어쩌다가 금요일 오후에 티타임을 하나 건졌는데 기쁜 마음으로 반차를 내고 떠났으나 교통정체가 상당해서 간신히 티타임 직전에 도착하는 바람에 클럽하우스를 구경할 겨를도 없이 스타트했다. 개장하고 10년이라도 건물이나 라커룸 등은 방금 지어진 것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여전히 라비에벨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산요수 cc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왜 버렸는지 (그것도 우정힐스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고수하는 코오롱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 코스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말 아름답고 공치기에도 편안한 골프장이다. 더운 여름을 보낸 직후인데도 양잔디 페어웨이의 관리상태가 완벽했고, 그린도 빠른 편이었다. 코스와 산세의 조화가 정말 잘 만든 코스라고 생각하면서 쳤는데 그렇다고 경치에 압도당하는 부담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쳐볼만하다 싶으면 공도 그럭저럭 잘 맞는다. 홀마다 대기가 없었고, 부지가 넓어서인지 다른 홀의 사람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페어웨이 중간부터 그린까지 벙커가 많아보이지만 홀의 모양을 조금만 유심히 본다면 돌아갈 길이 확실하게 보인다. 풍경에 취하고, 생각처럼 맞아주는 샷을 바라보면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시그너처 홀들이 15번부터 17번인데 티박스에서 바라보는 시야에 펼쳐져있는 계단식 논이 뭐라 말하기 힘든 아름다운 풍경이다. 논에다 지금은 벼가 아니라 노란 꽃을 심어놓은 모양인데 거기를 빙 돌아가야하는 15번에서는 가평베네스트 메이플 코스의 파 5 홀을 떠올렸으며, 파 3 홀인 17번에서는 논과 벙커를 넘어 보이는 그린과 그 너머의 산세가 잠시 넋을 잃게 만든다. 라운드를 마무리하는 18번에서는 저멀리 한옥 클럽하우스를 바라보며 전진하게 되는데 워낙 엄청난 경치를 지나온 터라 조금 심심했다. 혹시라도 코스 리노베이션을 한다면, 18번 티박스를 살짝 높혀서 페어웨이 우측의 호수와 클럽하우스를 좀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면 좋지 않겠나 생각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와서 그랬을까 실력이 좀 나아져서일까)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재방문이라서 아주 만족했다. 부킹이 어려워서 아쉬운데 입구에 지어놓은 골프텔에 숙박하는 경우 양쪽 코스를 함께 쳐볼 수도 있다고 하니 또 기회가 생길 것이다.